키움의 힘

우리 문화와 가치를 담은특별한 과자,

강정 乾飣

“연말에 한구가 없지는 않지만

非無臘尾多寒具

새해 아침에는 다른 무엇보다 떡국과 견고가 최고”

湯餠繭糕擅歲朝

홍석모(洪錫謨, 1781~1857), <도하세시기속시(都下歲時紀俗詩)>, ‘세찬(歲饌)’에서.

빙그레 웃음이 난다. 한구(寒具)는 기름에 튀긴 뒤에 꿀이나 조청을 먹여 만든 유밀과 동아리의 과자 일체를 이르는 말이고, 견고(繭糕)는 누에고치 모양을 내어 만든 강정이다. 이 시구를 남긴 홍석모는 조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사촌뻘 되는 인물로, 조선 팔도는 물론 청나라까지 두루 다닌 주유가(周遊家, 여행을 즐기는 사람)였다. 다닌 만큼 먹어본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세시풍속 기록에는 먹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음식 문화사를 공부하다 보면 만나지 않고 못 배길 인물이 또한 홍석모이다. 그런 그에게도 새해 아침에 떡국은 기본이고 아무튼 과자, 과자 가운데서도 강정이 있어야 새해가 새해다웠다. 과자 앞의 감각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다. 온 지구 모든 민족 공통이다. 과자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태어나 문명과 함께 진화해 꽃핀 사물이다. 과자 없다고, 못 먹어서 죽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배 채우는 것으로 다가 아닌 ‘사람의 음식’, 사료와는 다른 ‘문화와 함께인 음식’의 의미를 아주 강력하게 환기하는 사물이 곧 과자이다. 과자 없이 밥상, 다담상, 잔치의 흥성함을 제대로 채울 수 없다. 자그만 한 조각이 의례와 사교와 친목의 화룡점정이다. 없으면 아무래도 아쉽고 속상하다. 생일, 혼례, 기념일에 반드시 등장하는 케이크며 초콜릿 따위가 충분한 예가 되리라. 조금 더 논의를 키워보자. 과자는 주식과 다른 데 자리하는 별식이다. 과자를 만들 때 재료의 수율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은 공대로 들여야 한다. 과자는 1) 한눈에 들어오는 매력적인 빛깔 및 질감, 2) 아 예쁘다! 소리가 절로 나올 만한 조형미, 3) 품위 있는 단맛이 도드라지는 풍미, 이상 세 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이윽고 누구의 입 속에나 한 입 거리로 돌아가며 행복이라는 감각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행복이라는 감각과 만나, 과자는 드디어 제 역할을 다한다. 다시 홍석모가 읊은 강정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발효시킨 쌀가루 기름에 튀겨 내니 하나하나 같은 모양

酵粉煮油箇箇同

둥근 모양은 누에고치 같고 썬 모습은 파 썰어 놓은 듯하고”

圓形如繭削如蔥

<도하세시기속시(都下歲時紀俗詩)>, ‘건정(乾飣, 강정)’에서.

강정의 바탕은 찹쌀가루다. 그런데 그냥 날 찹쌀가루가 아니다. 먼저 찹쌀을 물에 일주일에서 열흘쯤 담가 삭힌다. 골마지가 끼도록 삭은 찹쌀은 건져 깨끗하게 씻어 빻아 고운체에 쳐 가루를 받는다. 이렇게 받은 찹쌀가루에 잘 빚은 청주와 꿀 또는 설탕물을 넣고 반죽해 꽈리가 일도록(공기층이 생기도록) 치댄다. 이를 다시 적당한 크기로 썰어 잘 말린다. 이렇게 마른 반대기를 청주에 적시는 작업을 한 번 더 하는 조리법도 있다. 이렇게 반대기가 잘됐거든 튀긴다. 여기 다시 꿀이나 조청 또는 되게 쑨 설탕물을 입힌다. 이 작업을 ‘즙청[汁淸]’ 이라고 한다. 여기다 참깨 또는 거피한 참깨, 잣가루, 콩가루, 송홧가루, 튀밥 등 고물을 묻혀 완성한다. 튀긴 반대기나 완성된 과자나 그 모양이 누에고치 같았기에 한자로는 ‘누에고치 견(繭)’ 자를 써 문헌에 ‘견고(繭糕)’ 또는 ‘견병(繭餠)’이라는 이름이 남은 것이다. 이만큼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인 끝에 강정이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홍석모는 또 다른 저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이렇게 기록했다.

“찹쌀가루를 술에 반죽하여 크거나 작게 (적절히) 썰어 햇볕에 말렸다가 기름에 지지면 누에고치 모양으로 속이 텅 빈 채 부풀어 오른다. 여기에 볶은 흰깨, 검은깨, 누런 콩이나 푸른 콩가루를 엿으로 즙청해 입힌 것을 강정[乾飣]이라고 한다. (중략) 잣이나 잣가루를 엿으로 즙청해 입히면 잣강정이라고 하고, 찰벼를 볶아 꽃송이같이 튀해 즙청해 입히면 매화강정이라고 하는데 홍백(紅白) 두 색이 있다.”

과자는 이런 사물이다. 속 빈 강정은 기술의 공력이 제대로 발휘된 완성도 높은 과자이다. 이어진 홍석모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게 공들여 만든 강정은 시월부터 설날과 봄철에 이르기까지 기제사 및 차례상에 과일과 같은 줄에 놓였고, “세찬(歲饌, 설날의 음식)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먹을거리”였다. 그거 뭐 옛날 이야기 아니냐고? 그냥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가령 약과는 밀가루를 귀하게, 또 잘 써 만드는 과자이다. 여기 견주어 찹쌀가루 잘 쓰기로는 강정만 한 과자도 다시없다. 저 복잡한 공정 속에 드는 한식 청주, 다양한 고물을 떠올려 보자. 원래 강정을 튀길 때에는 생참기름을 썼다. 즙청의 재료는 다양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조청이 마침맞았다. 과자 한낱에 연쇄되는 한식 식료, 그 무형의 문화유산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아깝다. 아까워서 자꾸 불러낸다. 잘된 강정은 이에 붙지 않고 스르르 녹으며 입 안과 목구멍을 기분 좋게 간질이다 사라진다. 바로 오늘날 최고급 제과의 영역에서 꿈꾸는 물성이자 질감이다. 조청은 어떤가. 옥수수 시럽 물엿은 조청이 아니다. 조청은 옥수수 시럽 물엿과는 전혀 다른 풍미를 뽐내는, 보리에서 온 사물이다. 최고급 튀김용 생참기름의 가능성은 어떤가. 또한 제대로, 쓸 데다 써야 이어지지 않을까. 과자뿐 아니라 이제는 온 국민이 즐기는 ‘튀김’ 일체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니 다른 무엇보다, 제과의 영역에서 벼, 쌀, 쌀가루를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자면 강정만 한 과자도 다시없을 테다. 이런 아쉬움이 부디 실제 기획으로 건너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강정 이야기를 굳이,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농촌진흥청 발행의 그린매거진에 쓰는 이유다.

필자 소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