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움의 힘

보빙사와 농무목축시험장,
그리고 최경석

보빙사 報聘使

1883년 보빙사 사절단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조선에 돌아온 최경석은 고종을 설득하여 이듬해 농무목축시험장을 세웠다. 새 농업 시험 터전이자 한국 근대 농업의 효시였다. 보빙사와 농무목축시험장 그리고 최경석을 돌아보며 우리 농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본다.

“보빙사는 해외박람회를 참관하기 위해 보스턴을 방문했다.

정식 조선관은 없었지만 조선 사람이 만든 몇 가지

물품의 견본, 조선산 천연자원은 도착했다. 보빙사는 오늘

두 군데 박람회를 비공식 방문했다. (중략) 미국 박람회에서는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관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 가운데서 목화와 목화씨에 특히 주목했다.

보빙사는 많은 양의 종자를 확보하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보스턴 모닝 저널(Boston Morning Journal)>,
1883년 9월 20일자➊에 보도된 보빙사 일행의 9월 19일 일정에서

‘선진지 견학’이라는 말이 있다. 농업과 농업의 주변에서 먹고사는 모든 이들에게 익숙한 말이다. ‘벤치마킹(benchmarking)’이라고 하면 눈에 더 잘 들어오고, 귀에 더 잘 들리고, 머릿속에 더 잘 떠오를까. 그 쓸모와 효과에 대한 시시비비는 잠깐 접는다. 절실해서 떠나는 길도 있는 법이다.

1883년 미국을 방문한 조선 외교 사절 보빙사(報聘使) 가운데 적어도 몇몇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절실했다. 보빙사란 곧 ‘초빙에 응해 보내는 사절단’, ‘상대국 사절단에 대한 답례로 보내는 사절단’이다. 1882년 5월 22일 조선과 미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한다. 1883년 1월 미국 상원에서 이 조약이 비준되었고, 5월 푸트(LuciusH. Foote, 1826~1913)가 조선에 공사로 왔다. 푸트는 고종에게 사절단 파견을 제안했고, 고종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조선의 외교가 바다 건너 미국을 향한다.

보빙사는 전권대사 민영익(閔泳翊, 1860~1914), 부대신 홍영식(洪英植, 1855~1884), 종사관 서광범(徐光範, 1859~1897) 등 그야말로 쟁쟁한 인물들이 이끌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메릴랜드대에서 농학을 전공하고 수석 졸업을 했으나 불의의 철도 사고로 졸업한 해에 사망한 아까운 인물 변수(邊燧, 1861~1891), <서유견문(西遊見聞)>(1895)을 쓴 유길준(兪吉濬, 1856~1914) 등이 수행원으로 함께했다. 보빙사 길의 선진 농업 견문을 1884년 조선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으로 꽃피운 최경석(崔景錫, ?~1886)도 그 일원이었다.

농무목축시험장은 새 작물과 새 가축 그리고 새 농업 기술을 시험·실험하기 위한 조직으로, 농촌진흥청의 설립 취지와 이상을 농촌진흥청 설립 백 년 전에 고민한 기관이다. 최경석은 미국을 다니며 다른 무엇보다 농장의 시설·농기계·가축에 푹 빠져들었다. <데덤트랜스크립트(The Dedham Transcript)> 등 당시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보빙사 일행은 9월 20일 보스턴 부근의 데덤에 자리한 한 농장을 방문한다. 방문해 농기계와 농기계 사용법, 온실, 축사 등을 두루 살폈다. 이들은 특히 조사료 가공, 사료 저장 시설[silo], 서양식 낫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축사에서는 가축의 등을 쓰다듬기도 했다.

당시 미국 언론은 일행의 면면을 뭉뚱그려 놓았지만 농장을 대국적으로 관찰하고, 그 생김새가 조선의 돼지나 소와는 전혀 다른 돼지와 소를 쓰다듬으며 감회에 젖었다면 필시 변수와 최경석일 테다. 또한 일행 가운데 미국 언론이 조선군 대령이자 저명한 식물학자로 일컬은 인물이 있었다➋고 했는데, 이 사람이 누구겠는가. 평생 무신(武臣)으로 살았고, 보빙사로 가기 전에 훈련원(訓鍊院)에 소속되어 죽기 직전까지 훈련원 소속으로 농무목축시험장을 맡았던 최경석 말고는 없다. 꽃동산에서 신이 난 헌걸찬 사람, 식물학자의 면모를 과시한 문무겸전의 군인, 그만큼 조선에서 농업을 걱정하고 농업을 공부하고 있던 공무원. 최경석은 견학을 다만 추억으로 간직하지 않았다. 최경석은 새로운 농업 기관을 설치하자고 고종을 설득했다. 덕분에 미국에서 농기계를 수입했고, 새 품종의 말과 젖소도 들여올수 있었다. 이때 버터와 치즈 생산까지 염두에 두었음은 물론이다. 갖가지 새 농작물과 채소 재배도 시도했다.

최경석이 새 작물과 가축에 부친 시험과 실험의 자취는 그가 기록한 <농무목축시험장소존곡약종(農務牧畜試驗場所存穀藥種)>➌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한다. 이 문서에는 시험·실험한 곡물과 채소 344종, 신품종 수퇘지 한 마리와 암퇘지 여섯 마리 그리고 그 사이에 친 새끼 쉰여섯 마리가 기록되어 있다. 아쉽게도 여기에는 시험·실험의 구체적인 면모는 없이 이름뿐이다. 하지만 이 소략한 기록에 절실하게 꿈을 꾼 사람의 열심과 악전고투가 깃들어 있다.

농촌진흥청 농업과학관 명예의 전당을 서성거린 적 있다. 한번 꼭 그러고 싶었다. 우장춘, 김인환, 유달영, 허문회 등 여러분의 인물상을 지날 때, 떠올리자고 마음먹을 것도 없이 최경석 이름 석 자가 떠올랐다. 그의 절실함, 그의 진심과 열심이 떠올랐다. 그때는 최경석에게도 조선에도 더는 기회가 없었다. 1886년 최경석은 돌연 숨을 거두었다. 홀로 동분서주하던 사람의 과로사였을 테다. 그러고는 관련 문서도 농무목축시험장도 방치되었다. 한순간에 스러졌다. 이후 나라가 망하기까지, 나라 망한 뒤의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그럼에도 이만한 마음이 19세기와 20세기와 해방을 관통해 한국에 이르고, 농촌진흥청에 다다랐다. 노스캐롤라이나의 목화 앞에, 데덤의 농기계와 사일로와 축사와 화원에 서 있던 사람이 있었다. 농학사(農學士)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있었고, 돌아가 실제로 최고결재권자를 설득한 사람이 있었다. 이 마음의 자취가 있어 그래도 전근대와 현대 농업사 사이에 역사적인 접점 하나가 마련된다. 새봄 농사를 준비하는 즈음에, 그저 뭉클하다

1 <농무목축시험장소존곡약종>의 표지. 표지 서명은 ‘시험장각종목록’으로 되어 있다. 이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2 문서의 첫 장. 보리, 콩, 옥수수 등 작물의 품종명으로 시작한다.

3 문서의 마지막 장. ‘농무목축시험장 관리 훈련원 첨정 신 최경석’ 한 줄이 선명하다. 업무 및 문서의 관리자, 책임자가 훈련원 소속, 첨정 벼슬의 최경석이라는 뜻이다.

변종화, <1883년의 한국 보빙사의 보스턴 방문과 한미 과학기술 교류의 발단>, ≪한국과학사학회지≫, 제4권, 제1호, 1982. 이하 보빙사 활동에 관한 문단은 이 논문 및 이 논문이 수록한 당시 미국 언론 보빙사 관련 기사를 재구성했다.

<로웰 데일리 시티즌(The Lowell Daily Citizen)>, 1883년 9월 21일자에서

군사 훈련, 병서 강습 등을 맡은 기관

필자 소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