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움의 힘

차 하나로 다가 아닌

차(茶) 이야기

4월이 되면 지천으로 피어난 봄꽃과 함께 차나무에도 연둣빛 새순이 돋는다. 봄볕에 깨어난 여린 첫잎을 따 한참 덖고 비비고 나서야 진한 향이 우러나는 첫물차 한 잔을 얻을 수 있다. 차의 계절이 돌아왔다. 한국과 중국,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이르기까지 차 문화 연대기를 다시금 살펴본다.

“사헌부(司憲府_조선의 감찰 기관)의

청사(廳事_사무동 또는 회의실)는 둘이 있는데,

물품의 견본, 조선산 천연자원은 도착했다. 보빙사는 오늘

다시청(茶時廳)과 제좌청(齊坐廳)이다.

다시’는 다례(茶禮)의 뜻을 취한 것이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사헌부제좌청중신기(司憲府齊坐廳重新記)>에서

‘찻잎 따는 4월이 코앞이다. 보성에서 하동 그리고 제주 권역 다원과 차 농민의 분주한 마음과 손길을 떠올린다. 아울러 여기저기 남아 전하는 차 관련 기록을 훑는다. 그 가운데 서거정이 남긴, 한 기관의 업무 공간에 관한 기록 속에 자리한 차 이야기가 눈에 머문다. 요컨대 서거정이 한창 일하던 조선 전기만 해도 ‘다시(茶時)’, 곧 영어의 ‘티 타임(tea time)’ 과 같은 의미의 말을 붙인 업무 공간이 있었다는 뜻이다. 서거정에 따르면 다시청에서는 서무를 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서로 툭 터놓고 말 나누며 업무 구상과 기획을 북돋았던 듯하다. 이윽고 열리는 엄중한 전원회의는 제좌청에서 진행한다. 다시청은 그야말로 차 한 잔 놓고, 담당자 서로가 마음 툭 털어놓고 말과 머리를 나누는 공간이었다. 그러라고 아예 사무동 또는 회의실 이름에 ‘다시[tea time]’라는 말을 붙였다. 융성했던 고려 차 문화를 이어받은 조선 전기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뒤지는 김에 차 마시는 모든 한국인, 차밭에서 애쓰는 모든 농민이 익히 알 만한 기록 또한 다시 본다.

“겨울 12월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문종(文宗)이 〔사신을〕 인덕전(麟德殿)으로 불러서 보고,

잔치를 열어주며 지위에 따라 차등을 두어 물품을 하사하였다.

당에 갔다 돌아온 사신인 대렴(大廉)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왔는데, 왕이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행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흥덕왕(興德王) 3년(828년) 기록에서

심상한 기록이 아니다. 중국 문명에서는 약 4,000년 전부터 차나무와 그 잎을 쓸모 있는 자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차나무 원산지는 오늘날 윈난(雲南) 또는 티베트 일대이다. 곧 중국 대륙 한구석이다. 이 때문에 차는 알려지고 나서 한참을 지나 상품화, 대중화에 접어들었다. 한나라 때(202~220년)에는 차나무 재배와 그 잎의 음료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당나라 때(618~907년)에는 전차(塼茶)➋가 나타났다. 송나라 때(960~1270년)부터는 녹차도 많이 마시게 되었고, 홍차는 명나라 때(1368~1644년) 등장한다. 차 문화와 차나무가 동아시아에 퍼진 시기는 당나라 때다. 인용한 <삼국사기> 기록을 통해서도 한반도 차 역사가 적어도 7세기에는 시작되었고, 차나무 재배가 뒤를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차 문화 세계사와 상통한다. 기록이 이렇다고 하면 차는 훨씬 이전에 한반도에 들어왔을 테다. 눈을 유럽으로 돌려보자. 16세기 중반 이후 차는 네덜란드와 영국을 거쳐 유럽으로 퍼진다. 청나라(1636~1912년)가 영국 및 유럽을 상대한 차 무역을 통해 19세기 전반까지 막대한 흑자를 거두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영국은 18세기를 지나면서는 중국 못지않게 차를 즐겨 마시게 되었으니, 19세기에는 공장 노동자도 차를 즐기게 되었다. 이 시기 영국에서, 오후 홍차는 서민 일상에도 자리를 잡는다. 이후 영국은 인도 대륙에서 차나무를 재배하며 ‘영제국홍차(英帝國紅茶, The Empire Tea)’를 생산하고 수출하는 데 이른다. 영국은 청나라 차나무를 인도 대륙, 스리랑카 등에 빼돌려 차 생산국이 됐지만, 그러고도 못 메꾼 무역 적자는 아편 판매로 감당하려 했다. 그러다 결국 청나라를 상대로 아편전쟁까지 일으켰다. 이 모두가 차 때문이었다. 산업 스파이에 전쟁 원인이라니, 참으로 어마어마한 경제작물 아닌가.

차는 홑으로 차가 아니다. 차는 찻상 차림을 부른다. 18세기 후반 중국 푸젠 및 광둥 설탕과 산둥 이북 콩기름이 서로 손을 잡으면서 월병, 사탕지(砂糖漬)➌ 등이 더욱 대중화되었다. 이는 다시 차와 손을 잡는다. 차 한 잔에 달콤하거나 짭짤한 과자 또는 딤섬[點心]을 곁들인 차림을 ‘점다(點茶)’ 라고 한다. 점다의 일상은 18세기 후반부터 중국 가정에 번진다. 이 모습의 영국판이 곧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이다. 오늘날 한국어에서 ‘점심’ 은 오로지 낮에 먹는 끼니를 이른다. 하지만 ‘역사적인 점심’에는 점다/afternoon tea/차와 함께하는 간식/과자/딤섬/오후 홍차(상차림)의 뜻이 두루 깃들어 있다. 다담상을 차리자면? 가정에서는 그래도 소담한 다탁에 말끔한 도자기를 갖추려 든다. 산업 현장에서는 실팍하면서도 설거지하기 좋은 최소한의 찻주전자나 찻잔 또는 찻종을 갖추려 든다. 차는 가구와 소목, 실내 장식, 차 도구, 다기, 식기 등을 보다 세련되게 만드는 데서 기관차 역할을 했다. 19세기 이후 영국이 꽃피운 티 타임(tea time),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는 다시 산업형 다방[茶房, teahouse], 카페(cafe) 등을 낳았다. 관련한 문화와 산업은 온 지구의 서구화와 함께 거꾸로 지구 곳곳에 퍼지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상의 연대기에 착안하고 싶다. 차과자라고 하면 파사삭하고 부서졌다가 잇새에 걸리지 않으며 녹는 강정이 더욱 그립다. 쨍하면서도 우아한 단맛을 전하는 약과나 정과는 어떤가. 포슬포슬한 질감이 찻물의 물기와 함께 입안을 채우는 잣설기며 두텁떡은 어떤가. 영국이 식민지 시기 인도에서 영국산 차를 생산한 지는 180년도 안 된다. 4,000년 차 문화사에 견주면 대단할 것 없는 세월이다. 전심전력해서 한 사물을 경영하다 보면, 그 사물은 당대에 내 것이 되게 마련이다. 이만한 생각을 품고 새봄, 남녘과 바다 건너의 차밭이 더욱 힘을 냈으면 한다. 해외 친구들은 한국에는 무슨 차가 있느냐고 해마다 더 자주 묻는다. ‘마셔봐야 맛을 알지!’ 짐짓 너스레 떨며 넌지시 보성, 하동, 김해, 지리산, 제주 이야기를 꺼낸다. 차의 가향가미 이야기를 하면서는 제주와 남해안 감귤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한과와 떡, 한국산 도자기와 목기며 칠기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다. ‘너희 차 역사는 산업 스파이사라든지 전쟁사겠지만, 한반도 차 역사는 ‘다시청’ 곧 ‘티 타임 홀(tea time hall)’ 같은 멋진 이야기와 함께야.’, ‘다산(茶山) 같은 작명법 들어봤어?’ 하면서 지금보다 더 신나게, 한국산 차를 자랑할 날을 기다린다. 새봄, 차밭은 더욱 빛나라!

<삼국사기>는 ‘大廉’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대렴’이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료를 잘못 인용하는 경우가 많아 굳이 밝힌다.

벽돌 모양으로 다져 만든 차. 찻잎을 수증기로 살짝 쪄 벽돌 모양으로 가공한다.

설탕수(시럽)를 씌워 만든 과자. 탕후루가 대표적이다.

필자 소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