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지혜가 깃든 물 저장소둠벙
국립농업과학원 기후변화생태과 김명현 063-238-2503
농촌환경자원과 정명철 063-238-2629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는 계절적으로 연 강수량의 50~60%가 여름에 내리기 때문에 쌀을 주곡으로 하는 농업 특성상 물관리가 한 해 농사의 풍흉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따라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사회에서 우리 선조들은 둠벙이라는 작은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 때 농사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고, 여름철 비가 많이 올 때 홍수를 조절해 왔다. 최근 기후변화에 의한 봄철 가뭄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지금 둠벙이라는 선조들의 지혜를 새롭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둠벙의 유래와 정의
- 둠벙은 주로 천수답에 의존하여 벼농사를 짓던 시절, 임시로 용수를 가두어 두는 물 저장고를 이르는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살펴보면 둠벙은 웅덩이의 충청도 방언으로 정의되고 있다. 지역에 따라 덤벙(경북), 둠뱅(전남), 둠벙(경기, 충청, 경남)으로 불렸으며, 인접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한 물웅덩이의 형태로 논의 가장자리에 주로 위치한다.
- 둠벙은 본래 지하수위가 주변보다 높아 항상 물고임 현상이 발생하는 곳에 자연적으로 생성된 소류지를 이르지만, 일반적으로는 빗물이나 하천수를 끌어와 인위적으로 저장해두는 논 주변의 작은 웅덩이와 물의 흐름이 느린 수로까지도 포함한다.
가뭄 극복을 위한 전통적 관개시설, 둠벙
- 우리나라에서 수전농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는 13세기 후반 ~14세기 초반이었다. 이 시기에는 주로 직파법(모를 기르지 않고 볍씨를 직접 논에 파종하여 재배하는 방식)으로 벼농사가 이루어졌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이앙법(모판에 일정기간 모를 길러 본답에 모내기하는 방식)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15세기 초반에는 국가단위의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지만, 현재처럼 수리시설이 설치된 지역이 많지 않아 주로 강우나 지하수에 의존하여 경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지역에서 벼농사를 위해 이용되던 관개시설 중 하나가 바로 둠벙이다.
- 특히, 산간지역은 평지보다 수리시설이 많이 부족하고, 계곡물 등의 취수원을 이용할 시 수온이 낮아 벼 냉해가 발생하기 쉬웠다. 이러한 벼 냉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선조들은 둠벙과 연계한 우회수로, 온수지, 뒷도구 등의 수리시설을 설치한 뒤 관개수를 햇볕에 장시간 노출하여 수온을 높여 논에 물을 대는 지혜를 활용하였다. 이러한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둠벙은 1970년대 이후 활발히 진행된 저수지와 댐 조성, 관개수로의 전국적 보급, 그리고 정부의 농촌근대화촉진법에 의한 경지정리사업과 함께 점차 사라져 갔다.
- 현재까지도 둠벙을 잘 활용하고 있는 지역이 있다. 바로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일대가 그 곳이다. 이 지역에서는 담수가 부족한 해안가를 중심으로 100여개 이상의 둠벙이 남아있는데, 둠벙이 있는 논은 이번 가뭄에도 무리없이 모내기를 할 수 있었다. 주변 저수지의 물은 완전히 고갈됐지만 둠벙의 물은 어느 정도 수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 고성 둠벙의 경우 「농촌 다원적 자원 활용 사업」에 선정되었으며 “국가 중요농업유산” 지정 신청을 준비 중에 있음
둠벙의 생태계 복원 기능
- 둠벙은 우리나라 농경생활 중 생성된 자연발생적 수리시설이라 할 수 있으며, 강수 및 지하수 공급으로 갈수기에도 물이 잘 마르지 않는다. 둠벙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서 비상 용수로의 기능뿐만 아니라, 어류나 수서무척추동물들의 피난처와 서식처로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 국립농업과학원에서는 2010년부터 2012년까지 8개 지역에서 15개의 둠벙을 대상으로 수서무척추동물에 대한 조사를 하였고, 그 결과 총 131종 137,118개체를 확인하였다. 국내 최대 습지인 우포늪의 출현종이 135종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둠벙이 매우 높은 생태적 가치를 지녔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또한 전국 5개 지역에서 둠벙이 있는 논과 없는 논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둠벙이 있는 논(59종, 50,274개체)이 없는 논(50종, 18,662개체)에 비해 수서무척추동물이 2.7배 정도 많이 서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연체동물문과 환형동물문과 같이 물길을 통해서만 이동이 가능한 무리에서 큰 차이를 나타냈다.
[둠벙 유무에 따른 논 내 수서무척추동물 종 다양도 및 밀도]
생태와 전통지식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둠벙
- 둠벙은 과거에는 흔히 볼 수 있었으나 최근에는 쉽게 볼 수 없는 물방개, 물맴이, 장구애비, 게아재비 등을 관찰할 수 있어 아이들의 생태체험장으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수서생물뿐만 아니라 둠벙 주변에는 유난히 철새 발자국과 배설물이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고, 둠벙이 있는 마을에만 제비가 집을 짓고 산다는 주민들의 구술도 있다.
물방개물맴이장구애비게아재비[둠벙에 살고 있는 생물들]
- 지금은 대부분 모터를 이용해 둠벙에서 논에 물을 대지만, 과거에는 용두레, 맞두레, 물두레를 이용하여 인력으로 농업용수를 공급하였다. 이러한 농업유산은 전통 농법의 현장체험학습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용두레맞두레물두레
[물두레의 원리(지렛대와 시소의 원리)]
- 예전에 우리네 할머니들은 집 근처에 있는 둠벙에 용왕이 산다고 믿었으며, 정초가 되면 제물을 장만하여 둠벙에 가서 차려 놓고 가족의 무병장수와 재복을 기원하기도 했다.
- 가을이 되어 벼를 수확하고 나면 둠벙의 물을 모두 퍼서 그 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미꾸리, 붕어, 메기 등)를 잡아 어죽을 끓여 이웃사람들과 나눠 먹으면서 농사일의 고단함을 달래기도 했다(천렵, 川獵). 이렇게 어죽을 끓여 먹는 날은 마을 사람들이 음식과 술을 나눠 먹으며 잔치판을 벌이기도 했다.
※ 천렵(川獵) : 냇물에서 고기를 잡으며 즐기는 놀이
- 이처럼 둠벙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농업생태계의 생물다양성 보전 및 증진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다. 둠벙의 생태보전적 측면(생물다양성 증진, 수질 개선 등)은 농촌어메니티적 측면(볼거리 제공, 생태체험, 역사체험 등)과 결합하여 최근 새로운 농촌환경자원으로 부각되면서 다시금 복원되고 있다.
- 특히, 전라남도에서 2007년부터 현재까지 약 700여개의 친환경 둠벙을 조성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안정적인 농사와 수확량 증대를 위한 선조들의 지혜였던 둠벙이 현재에 이르러 자연환경 및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새로운 가치로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