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일생의 3분의 1을 자면서 보낸다. 게다가 12분의 1은 꿈을 꾸면서 보낸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이 시간에 관심이 없다. 단순히 신체가 회복하는 시간으로 보기 때문이다. 무익하다고 오해받는 수면 시간이 우리의 신체적, 정신적 가능성을 극대화시킨다면 어떨까? 차진경 농업연구사의 추천 도서 『잠』을 통해 수면에 숨겨진 무한한 가능성을 생각해본다.
밀 육종을 향한 7년의 시간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남부작물부 논이용작물과에 근무중인 차진경 농업연구사는 올해로 7년째 제빵용 밀 육종과 가공 이용을 담당하고 있다. 대학 4학년이 되던 해인 2017년 남부작물부로 발령받은 그는 ‘밀이라는 작물에 있어 손꼽히는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안고 연구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식물을 좋아했어요. 토마토 모종을 직접 키워본 경험도 있죠. 살아 숨쉬는 생명과 맞닿은 직업을 꿈꿨던 저에게 국립식량과학원은 꿈의 직장이었죠.”
지난해 차진경 농업연구사는 처음 국립식량과학원의 문턱을 넘을 당시 염원했던 소망을 이뤘다. 세계 최초 ‘밀 스피드 브리딩(Speed Breeding)’ 기술 개발에 성공해 품종 개발 기간을 46%나 단축하는 큰 성과를 거둔 것이다. 해당 성과는 지난해 12월 열린 농업과학기술 우수성과 공유대회에서 우수성과로 선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2023년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도 선정되었다. 또, 식물학 세계 3대 학술지 중 하나인 ‘모레큘러 플랜트(Molecular plant)’에 논문이 실렸다.
밀 품종 개발 기간은 2000년대 이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13년으로 답보 상태에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가을 재배형 밀 재배는 시간·경제적 비용 소모가 크다. 개발 기간을 혁신적으로 줄인 밀 스피드 브리딩 기술은 그래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국내 밀 자급률 제고와 우리 밀 확산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밀 스피드 브리딩은 가을 재배형 밀을 저온 처리해 성장을 촉진하는 기술입니다. 밀은 1년에 한 번만 재배할 수 있기 때문에 품종 하나를 만드는 데 보통 13년 정도가 걸리는데요. 밀 스피드 브리딩 기술을 활용하면 씨를 뿌린 뒤 55~60일 만에 이삭이 나오고 88일 만에 수확할 수 있습니다. 1년에 4번 밀을 재배할 수 있기 때문에 품종 개발 기간을 7년으로 절반가량 줄일 수 있죠. 호주 연구팀에서 개발한 봄 재배형 밀 스피드 브리딩 성과를 바탕으로 부족한 점을 보완해 기술 개발을 진행했는데요. 기술 개발부터 안정화까지 1년여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은 스피드 브리딩 기술을 이용해 본격적으로 품종 개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최고가 되기보다 ‘최선’을 다하기를
세상사 모든 일이 그렇듯 밀 스피드 브리딩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수차례 실험을 반복했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밀 이삭’을 만나게 된 것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진행했던 실험에서였다.
“처음 이삭을 발견했을 때 감동을 잊을 수 없어요. 벼랑 끝에서 만난 한 줄기 희망 같았죠. 그 자리에 이종희 농업연구관님도 함께 계셨는데 ‘연구자로서 앞으로 일하는 내내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게 될 것’이라며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어요. 언젠가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의 감동을 떠올리며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차진경 농업연구사에게 밀 육종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처음의 소망이 여전히 유효한지 물었다.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최고가 되기보다는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더 오래오래 즐겁게 연구 활동을 이어 나가는 게 지금의 소망이에요. 농업연구사로 일한 지 어느덧 7년차가 됐네요. 올해는 국립식량과학원에서 보낸 그동안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초심을 찾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새롭게 그리고 싶어요.”
조금 빠를 수도 느릴 수도 있겠지만 새싹이 돋고 꽃을 피우며 이삭을 맺고, 다시 싹을 틔우는 대자연 속 순환과 같이 거스름 없이 현재를 온전히 즐기는 것. 차진경 농업연구사는 밀을 키우는 동안 밀처럼 사는 법을 배웠다.
잠과 꿈, 현실로 영감을 이끌어내다
차진경 농업연구사가 추천하는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지은 소설 『잠』이다. 저자는 잠을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으로 보지 않는다. 탐험하고 정복해야 할 신대륙으로 봤다. 차진경 농업연구사는 대학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에 이 책을 만났다.
“농업연구사로 일하면서부터는 책을 많이 읽지 못했어요. 업무와 관련된 논문이나 전문 서적만 읽게 되더라고요. 저는 평소 잠이 많은 편이어서 주말이면 늦잠 자는 게 일과예요. 흔히 잠 많은 사람은 게으르다고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꿈은 내 모든 영감의 원천’이라는 베르베르의 말처럼 잠과 꿈은 어쩌면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시간 아닐까요? 다만 꿈에서 깬 후 자각하지 못할 뿐. 실제로 실험에 난항을 겪을 때, 자고 일어나서 거짓말처럼 해결책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요. 그런 영감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요? 바로 잠 아닐까요?”
1869년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옆방에서 들리는 클래식 음악을 듣다 잠이 들었고, 이 때문에 기초 화학 원소들이 음악 주제처럼 연결돼 있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어난 후 그는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화학 원소를 최초로 분류하고 정리한 ‘주기율표’를 만들었다. 잠의 무한한 가능성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누군가는 불안에 짓눌려 잠을 못 이루고, 또 누군가는 일부러 카페인을 섭취해 가며 잠을 밀어냅니다. 하지만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건 우리 일생의 3분의 1이나 되는 시간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잠과 꿈의 세계를 탐험할 수 없죠. 잠을 빼앗긴 채 무의식 속에서조차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지 못하는 분이라면 『잠』을 읽으며 ‘잘 잔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베르베르는 ‘현실이 믿음이라면, 꿈은 일체의 믿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현실을 깨고 꿈의 세계를 받아들였을 때, 우리는 스스로의 무한한 가능성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 감히 예측해본다.
인간이 감히 정복하지 못한 마지막 대륙, 잠의 세계로 향하는 탐험을 그린 2부작 모험 소설이다. 꿈을 제어할 수 있거나 꿈을 통해 과거로 갈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소설은 인간의 뇌 활동이 가장 활발히 일어난다는 수면의 6단계에 주목한다. 저자는 ‘현실이 믿음이라면, 꿈은 일체의 믿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것이 바로 잠자는 시간이라는 것. 책을 덮고 나면 잠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으며 모든 것을 뒤로하고 세상에서 가장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먼저 온 미래, 우리 농업 농촌. 농촌진흥청에는 농업과 농촌을 연구하며 기술을 보급하는 농업 과학자, 농업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농업을 과학으로 이끄는 선구자들입니다. 농업 과학자는 어떤 책을 읽고, 연구에 활용할까요? ‘2023 농업과학기술 우수성과 공유대회’를 통해 선정한 농업 과학자들의 서재를 들여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