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움의 힘

응축된 한국인의 밥상

김밥

날이 점점 더워지는 요즘, 특유의 아삭한 식감과 청량한 향기가 매력적인 미나리로 입맛을 돋워보는 건 어떨까? 고려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우리 식문화에 스며들어 다양한 요리 재료로 쓰인 미나리의 연대기를 돌아본다.

“ 남녀노소 어느 누가 해태를 먹지 아니할까만

특히 학동들의 식탁에서의 행사를 유의하여 보면

제일 먼저 해태에 젓가락이 간다. 전남 주민들은 해태를

속칭 밥도둑놈(식도적[食盜賊])이라고 부른다. …

우리는 벌써 원족(遠足)이나 운동회나 여행 시에도

김밥을 먹는 습관이 들었다….”

정문기, ‘한국해태(海苔)의 현상과 영양가 2’, <경향신문>, 1955년 5월 28일 자에서

여행도 등산도 나들이도 한창이다. 가족과 어울린 소풍도 즐거울 때다. 계절에 국 어류학 초기의 인물 정문기(鄭文基, 1898~1995)가 남긴 글을 들여다본다. 두 세대도 더 전에 이미 ‘밥도둑(놈)’ 같은 표현이 있었다니 슬며시 웃음이 난다. 그 한자어 ‘식도적’은 무시무시한 표현인지라 더욱 재미나다. ‘적(賊)’은 ‘살인강도’까지 아우르는 글자이다. 무엇보다 학자이자 공무원인 정문기가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문체로 김의 현황을 정리하는 가운데, 밥도둑뿐 아니라 김밥까지 예로 들며 김의 가치를 대중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새삼스럽다.

김밥. 흰밥을 마른김 위에 펴 놓고 여러 가지 반찬 및 양념을 소로 얹어, 둘둘 말아 만드는 음식이다. 길게 말아 썰어 먹기도 하고, 손가락 모양에 손가락 크기로 말아 그대로 먹기도 한다. 김으로 감싼 주먹밥이나 김 가루에 굴린 주먹밥도 김밥의 일종이다. 1990년대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화한 삼각김밥도 있다. 김밥. 보신 것처럼 1950년대에도 원족·운동회·여행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음식으로 거론되고 있었으니, 이보다도 전에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을 테다. 언제 태어나 오늘날에 이르렀을까? 무어라 단정해 말하기 어렵다. 다만 마른김의 역사와 마른김에 밥을 싸 먹는 역사가 나란했으리란 짐작은 할 수 있다. 국 끓이고, 나물 무치고, 전 부치자면 물김으로 그만이다. 하지만 밥을 싸 먹자면 마른김이어야 한다. 지구상에서 김 양식의 역사를 처음 시작한 한반도에서는, 적어도 조선 전기에 마른김 유통이 전국화한 듯하다. 마른김과 짭짤한 간과 흰밥이 만나면 밥맛은 배가된다. 배가되다 폭발하기에 이른다. 그 맛을 즐기다 보면 사람들은 곧잘 체면을 잃기도 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사소절(士小節)> 속 한 대목이 재미있다. 이덕무는 이 책에서 “상추[萵苣]·취나물[馬蹄菜]·김[海苔] 따위로 쌈을 쌀 때 손바닥에 바로 놓고 싸지 말라. 단정하지 못해 좋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당부했다. 이어 “입에 넣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싸서 볼이 불거져 보기 싫은 꼴을 하지 말라”고도 했다. 이 구절은 뒤집어서 읽어볼 만하다. 맛난 쌈을 먹을 때, 아무리 교양 있는 체하는 사람들도 곧잘 정신없이 쌈거리에 마구 손을 가져다 댔던 모양이다. 그러고는 볼이 불거질 만큼 쌈을 입에 욱여넣고는 우걱우걱 씹어 삼켰던 모양이다. 김쌈 등의 맛은 선비의 체면도 한순간에 잃게 할 만했다고 되새길 수 있겠다. 김으로 밥 싸 먹는 문화가 이렇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고소설 <심청전>(완판본)에도 김쌈이 등장한다. 심청이 인당수로 떠나는 날 아침, 마지막으로 아버지 심학규의 밥상을 차린 심청은 “자반도 떼어 입에 넣어 드리고 김쌈도 싸서” 수저에 놓는다. 자반과 김쌈이 있는 밥상 앞에서, 심학규는 딸자식의 속도 모르고 주절댄다. “야, 오늘은 반찬이 별(別, 특별히)로 좋구나. 뉘 집 제사 지냈느냐?”

마른김은 자연스레 쌈이 됐고, 싸다 보면 주먹밥 모양으로도, 오늘날의 김밥 모양으로도 모양을 잡게 마련이다. 그러다 한국인은 일본 문화와 만나며 자연스럽게 김초밥인 ‘노리마키(海苔卷き)’와도 만나게 되었다. 노리마키는 ‘김에 싸기’에 익숙한 민족에게 ‘김에 말아 모양 잡기’를 보여주었다. 이와 함께 단촛물[寿司酢]로 흰밥에 밑간하는 방식도 보여주었다. 더욱이 이 방식은 학교와 야외활동의 도시락과 금세 손을 잡는다. 이런 식이었다.

“원족에 먹을 점심은 너무 달거나 짠 것은 좋지 못하고

깨를 볶아치고 주먹밥을 만들거나 김을 부수어 넣고

김밥을 만드는 것도 좋으며….”

‘자녀를 기르는 데: 원족의 주의’, <조선일보>, 1925년 6월 5일 자에서

“벤또를 만들려면 오늘까지 생각한 가운데 맛으로나 모양이나

간편한 것으로는 김밥이 제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마는….”

홍선표, ‘내일 벤또반찬은 김밥’, <조선일보>, 1939년 6월 18일 자에서

이즈음 그 밑간에는 참기름이 끼어들지 않았다. 밑간은 단촛물이었다. 40대 후반 이상의 독자께서는 단촛물로 밑간한 김밥을 바로 떠올릴 수 있을 테다. 한편 당시 김밥 소는, 오늘날 일식집 노리마키에도 흔한 일식 박고지조림과 생선보푸라기 등이 쓰였다. 동시에 장조림이며 구운 김치 등 한국인의 반찬이 또한 김밥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김밥은 노리마키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제 길을 잡아 오늘에 이르렀다. 김밥은 한국인의 밥상을 응축해 말며 김밥 연대기를 이루었다. 일반적인 김밥의 소란 곧 한국인의 밥상에 오르는 반찬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김밥에 김치 박기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식민지 시기에 시작되었다. 밑간에서는 참기름의 풍미를 빠뜨릴 수 없다. 소는 어느새 반찬의 범위도 넘어섰다. 아보카도, 치즈, 소시지, 통조림 다랑어에서부터, 불고기, 제육볶음, 떡갈비, 돈가스에 이르는 일품요리까지 축소 재현해 품는다. 볶은고추장에서부터 온갖 드레싱과 페스토가 슬쩍 끼어들어도 자연스럽다. 김밥은 어떤 자원이나 조건이든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융통성을 발휘한다. 김밥은 김의 역사, 쌈의 역사, 노리마키와 밀고 당긴 역사를 모두 품고 현재진행 중이다. 지역마다, 지역 특산물로 새로운 시도를 해볼 만한 음식이 또한 김밥이다.

여기서는 ‘행동’, ‘하는 짓’의 뜻

소풍

‘교양 있는 사람이 지켜야 할 일상생활 예절’이라는 뜻

이덕무는 숟가락으로 밥을 뜨고, 젓가락으로 쌈을 싸라고 했다.

도시락

필자 소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