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농업은 팬데믹 이후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웰니스 열풍이 불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2021년 치유농업법이 시행되며 본격적으로 성장세에 올랐고, 이와 함께 치유농업사라는 새로운 직업도 등장했다. 치유농업은 왜 우리 농업·농촌의 신성장 동력으로 주목받고 있을까? 또, 치유농업사는 어떤 역할을 할까? 강원도 춘천에서 고은원예치료센터를 운영하는 김영숙 치유농업사를 만나본다.
치유,
농업에 새바람을
일으키다
단순히 농작물 수확 체험을 하거나 농가 맛집을 찾아가던 형태의 농촌 관광이 ‘치유’와 만나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다. 2013년 1조 6,000억 원이던 국내 치유농업 시장 규모는 2017년 3조 7,000억 원까지 성장했다. 2017년으로부터 8년여가 흐른 지금, 2021년 치유농업법까지 시행되면서 시장 규모는 훨씬 커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2020년 234곳이던 전국 치유농업 시설도 2022년 353곳으로 늘어났다. 농민신문에 따르면 치유농업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도시농업 인구가 10년 새 12배(2021년 기준)로 증가했다고 한다. 치유농업이 활성화되면서 우리 농업·농촌이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치유농업은 식물, 동물, 음식, 농작업, 경관과 문화 같은 농업·농촌 자원 또는 이와 관련한 활동과 산출물을 활용한 프로그램으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합니다. 특히 신체적인 질환으로 인해 재활 중이거나 약물 중독, 치매 환자, 사람들과 정서적 상호작용이 어려운 이들에게 효과적입니다. 이와 함께 도시화와 개인화에서 비롯된 심리적·정서적 문제가 점점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보다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고 싶어 하는 일반인의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치유농업은 농업·농촌의 다양한 자원을 치유 소재로 활용하는 만큼 대상자별 맞춤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치유농업사다. 2021년 농촌진흥청은 전국 11개 양성기관을 지정하고 2급 치유농업사 양성 과정 교육을 진행했다. 당시 2급 치유농업사 국가자격증 최종 합격자는 90여 명이었다. 김영숙 치유농업사도 그중 한 명이다.
“양성기관에서 142시간의 교육을 수료하면 2급 치유농업사 시험 자격이 주어지는데, 교육 과정 대상자 선발부터 경쟁이 매우 치열합니다. 치유농업의 전망이 밝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아닐까요? 선발 과정에서 간호사, 교사, 원예치료사, 농업인 등 치유농업에 도움이 될 만한 각종 경력을 갖추고 있는 경우 가산점이 부여되는데요. 저도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고 기간제 교사로 일했던 경험이 있어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경력보다 중요한 건 가치관인 것 같아요. 몸과 마음이 아픈 고객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더 세심한 배려와 친절,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치유농업이 지닌 사회적 가치를 이해하고, 생명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사랑의 본질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치유농업사가 될 수 있을 걸로 생각합니다.”
원예치료로 시작한
치유의 길
김영숙 치유농업사가 귀촌한 지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자녀가 자연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으로 무작정 춘천에 내려와 버섯 농장을 시작했다. 농장을 운영하는 틈틈이 춘천여중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했는데, 그때 처음 원예치료를 마주하게 됐다.
“방과 후 교육복지대상 아동들을 위한 원예치료 프로그램에 보조교사로 참여하게 됐는데, 프로그램 진행 후 아이들에게 변화가 일어나는 걸 직접 확인할 수 있었어요. 2008년 강원대 평생교육원에서 원예치료사(현 복지원예사) 과정을 수료하고, 2009년 (사)한국원예치료복지협회에서 원예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본격적으로 원예치료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원예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김영숙 치유농업사는 잊지 못할 경험을 많이 했다. 그중 작은 화분에서 피운 꽃 한송이에서 비롯된 기적 같은 변화는 큰 보람과 감동을 선사했다.
“돌봄이 필요한 한부모·다문화·조부모 가정 아동들은 대부분 교내에서 친구들에게 소외된 채 생활하기 일쑤입니다. 원예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도 마음에 어두운 그늘을 갖고 있었지요. 그렇게 서로 서먹함만을 느끼며 위축되어 있던 아이들이 작은 화분에 꽃씨를 심고 키우면서 천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어요. 공통의 주제가 생겼기 때문 아닐까요? 또,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한 아이는 집으로 화분을 가져가기도 했는데요. 사춘기가 되면서 할머니와 관계가 소원해질 무렵 함께 꽃을 키우면서 대화가 늘었다고 해요. 할머니 손을 타서인지 금세 쑥쑥 자라 꽃을 피운 화분 사진을 보여주며 친구들에게 자랑하더군요. 조용했던 원예실이 아이들의 이야기 소리로 가득 찬 순간 정말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작은 꽃 한 송이가 관계 회복의 열쇠가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사시사철
치유를 선물하는
키친가든
현재 2급 치유농업사 자격증 취득자는 350명가량이다. 자격증을 취득하지 않아도 양성기관에서 교육 과정을 수료하기만 하면 농장을 운영할 수 있지만,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으면 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다.
“2급 치유농업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면 농촌진흥기관인 농업기술원과 농업기술센터, 치매안심센터,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농장 등에 취업하거나 프리랜서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오랜 경험을 쌓은 뒤에는 직접 치유농장을 창업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가치관 외에도 치유농업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축적된 경험이 필요합니다. 치유농업은 활용할 수 있는 치유 자원과 프로그램 유형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지요.”
김영숙 치유농업사는 오랜 시간 원예치료사로 일해왔을 뿐만 아니라, 국가자격시험 시행 이전부터 치유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원예치료만 15년, 그 가운데 원예치료센터와 치유농장 운영이 올해 9년째 접어든 1세대 치유농업사라 할 수 있다. 그도 처음에는 감자나 고구마, 옥수수 등을 심고 수확하는 과정 위주의 체험을 진행했다. 하지만 지금은 ‘키친가든’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참여자들이 식용작물을 직접 심고 관리하며 요리까지 해 먹는 형태로, 수확기에만 반짝 방문하던 참여자들이 사시사철 자주 농장을 찾을 방법을 고민하다가 얻은 묘안이었다.
“농장을 방문한 분들에게 농장을 찾고 싶게 만들 만한 요인이 무엇이 있을지 물었어요. 그랬더니 하나같이 농작물을 활용한 신선한 먹거리와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을 이야기하더라고요. 도시민들이 키우기 어려워하는 허브도 키우고 수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고요. 많은 분의 의견을 듣고 고민한 끝에 ‘키친가든’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치유농업사란
제 집
앞마당을
내어주는 사람
지난해 키친가든 이야기 청소년편인 ‘한땀 한땀 청소년과 함께하는 치유농업 프로그램’이 농촌진흥청이 개최한 ‘제19회 생활원예·치유농업중앙경진대회’에서 농식품부장관상인 최우수상을 받으며 저력을 인정받았다. 처음 지역아동센터 청소년을 대상으로 만든 프로그램은 학교밖청소년을 위한 ‘청소년날개편’이다. 노인을 위한 ‘실버편’과 치매 노인을 위한 ‘실버기억편’ 등 대상자를 확대해 나가며 발전하고 있다.
“치유농장을 운영하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연인으로 처음 방문했던 참여자가 부부가 되어 다시 찾아오기도 하고, 청소년기에 방황했던 아이가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다는 소식도 들었지요. 저는 이곳에 농작물이 아니라 사람을 심는다고 생각해요. 치유란 거창한 게 아니라 농촌의 삶과 도시민의 일상이 자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가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치유농업사란 ‘제 집 앞마당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요. 앞마당 텃밭이 열린 공간이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소통할 때, 그 접점 안에서 치유의 힘이 더 크게 발휘될 수 있으리라 믿어요.”
주마다 치유농업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한 어르신이 있다. 어르신은 '얼마 전 아들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며, 김영숙 치유농업사의 손을 움켜쥐듯 꽉 잡은 채 눈시울을 붉혔다. 매일 아들 생각에 눈물이 나고 집에 우두커니 앉아 있기 일쑤였는데, 치유농업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나왔다고 한다. ‘내가 다시 일어서야지, 다시 걸어 나가야지’라는 마음으로 농장을 찾은 것이다. 어르신은 농장에서 꽃을 보고 허브 향기를 맡으며 위로를 얻는다고 한다. 풀을 뽑고 있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평안해진다고 한다.
“어르신에게 그랬듯이 우리 농업·농촌이 생명과 치유의 터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농장 가득 피어난 꽃과 농작물, 기별 없이 찾아오는 벌과 나비, 아침을 깨우는 오골계와 작은 강아지 등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 나누고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치유의 본질 아닐까요?”
올해 6월 치유농업법이 새로운 개정 소식을 알렸다. 개정 항목에는 치유농장에 대한 국가공인 품질인증도 포함되어 있다. 올 한 해 동안 준비 기간을 거쳐 2025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김영숙 치유농업사는 치유농업 품질인증 제도가 실시되면 치유농장의 전문성과 신뢰도가 높아져 치유산업이 더 활성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고은원예치료센터가 명품 치유농장으로서 위기 속에 놓인 우리 농업·농촌을 치유의 길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