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땀을 많이 흘려 쉬 지치고 입맛조차 사라질 때다. 이럴 땐 산해진미보다 새콤달콤 시원한 냉국 한 사발이면 족하다. 한국인의 여름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 ‘냉국’의 연대기를 기록해 본다.
계절은 냉국을 타고도 온다. 들이켜면 속이 후련해지는 겨울 동치미는 더 기다리자. 여름에는 냉국이 있다. 아무리 물기 넉넉하게 잡아 여름 김치를 담갔다 해도, 여름날의 김칫국이 다른 쓰임으로 요긴하다 해도, 한 사발 들이켜며 속을 확 풀자면, 단박에 땀을 내리자면 역시 냉국이겠다. 밑간 잘 하고, 식초 잘 쓰기만 하면 동치미 못지않게 쩡한 맛까지 느낄 수 있는 고마운 음식 겸 음료가 냉국이다. 이 개운하고, 청량한 음식은 그 이름이 여럿이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찬국’, ‘창국’, ‘냉탕(冷湯)’, ‘생갱(生羹)’이란 말이 있었다. ‘찬국’은 그야말로 불기 없이 만들어 시원하게 훌훌 마시는 국이라는 뜻이요, ‘창국’은 같은 어휘에서 발음과 표기만 변한 말이다. 이 말을 그대로 한자로 쓰면 ‘냉탕’이겠다. ‘생갱’은 불도 쓰지 않고, 익히는 과정도 없이 만드는 국[羹]이라는 말이다. 그러다 1938년 문세영(文世榮, 1888~?)이 엮은 『조선어사전』(초판 1938년)에 이르러 ‘냉국’이 사전의 표제어에 올라 오늘날에 이른다. 북한에서는 ‘랭국’을 문화어의 대표 어휘로 잡아 놓고 있다. 남북, 말의 맥이 다 통한다.
다시 냉국으로 돌아가자. 어떤 음식인가. 국립민속박물관이 펴내는 『한국민속대백과사전』➊에 따르면 ‘오이, 미역 등 채소와 해조류 등을 원료로 하여 냉수에 간장·식초로 간을 하고 고춧가루·깨소금·참기름·파 등을 넣어 차게 만들어서 주로 여름철에 먹는 국’이다. 이 풀이만으로도 우리는 쉬이 냉국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냉국은 한국인의 여름 일상에서 그만큼 익숙하고 친근하고 고마운 존재이다. 냉국은 여름 오이를 참 잘 쓰는 음식이기도 하다. 오이뿐 아니라 오이지로도 멋진 냉국을 말곤 한다. 오이의 친구 가지도 곧잘 냉국에 끼어든다. 아니, 이것만으로는 모자란다. 냉국은 한반도의 서·남·동해안, 내륙의 들판 또는 산간을 따라 이루다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다. 오이 이야기는 빼고 주워섬겨 본다. 가지냉국, 양배추냉국, 물외냉국, 파초(반치)냉국, 노각냉국, 배추냉국, 더덕냉국, 실파냉국, 마늘냉국, 두릅냉국, 각색버섯냉국, 무짠지냉국, 밀피냉국, 묵냉국, 청각냉국, 다시마냉국, 톳냉국, 성게냉국, 해삼미역냉국… 아아, 여기다 사리를 말면 아쉬운 대로 냉면 흉내도 낼 수 있다. 실제로 북녘 고향을 떠나 남쪽에 정착한 분들은 일쑤 오이냉국에다 국수틀에서 내린 사리를 말곤 했다는 고향 이야기를 하신다. 아무튼 그 간은 장과 초와 기름 등이 맡는다. 깨소금이며 고춧가루를 쓴다고 하면 아주 조금, 예민하고 섬세하게 써야 한다. 냉국에 양념하는 법수와 솜씨는 그 사람의 한식 감수성, 한식 조리 기본기를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익숙하고 친근하고 고마운 음식이 돼 파고들면 까다로운 데가 없다고 할 수 없는 음식이 또한 냉국이다. 전에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오로지 새콤달콤만은 아니었다. 한국 음식 연구 및 한식 병과 경영의 선구자 조자호(趙慈鎬, 1912~1976)의 『조선요리법(朝鮮料理法)』(1939년) 속 ‘찬국 만드는 법’도 재밌다. 미역찬국, 김찬국, 오이찬국, 파(실파)찬국 네 가지를 아우른 이 장의 ‘미역찬국’ 조리법이 이렇다.
“ 좋은 미역을 줄거리를 빼고 잘게 찢어서 정하게 빨아 가지고,
고기를 연한 살로만 조금만 곱게 다져서 양념해 볶아서 넣고,
간장, 초를 간 맞게 치고, 실파를 곱게 조금만 썰어 넣고
고춧가루도 약간 쳐서 뒤적거려 놓았다가,
물을 적당히 붓고 얼음을 잘게 깨뜨려서 지릅니다.”
무슨 냉국에 고기를 양념해 볶아서? 하고 놀라실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때에 는 조미료에다 유화제 노릇을 하는 설탕은 껴들지 않았다. 식초라고 하면 그저 산도 4%~7% 사이의 식초를 쓸 시절이다. 오늘날 흔히 먹는, 찌르는 신맛의 양조식초의 산도는 높으면 19%에 이르기도 한다. 그런 조건에서 한식 기본 간장을 간의 기본으로 해, 보다 맛난 맛의 냉국을 하자니 소고기를 쓰기도 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선 조리서인 방신영(方信榮, 1890~1977)의 『일일활용조선요리제법(日日活用朝鮮料理製法)』 (1934년)의 ‘찬국 만드는 법’에도 소고기 등을 쓰는 냉국 조리법이 나온다. 이 장의 ‘메역(미역)찬국’은 이렇다.
“ 미역을 물에 담아 정하게 빨아 줄거리는 빼고 잘게 썰어 놓고
고기는 기름 없는 순전한 살코기로만 잘게 이겨서(다져서)
파 이긴 것과 후추와 깨소금을 넣고 간장을 치고
한참 섞은 후 미역과 함께 냄비에 기름을 바르고
화로에 올려놓고 숟가락으로 저어 가면서 볶다가
고기가 다 익거든 펴 놓고 다 식혀서
초와 물과 간장을 적당히 넣고 맛을 만들어서 먹느니
김치 대신으로 먹는 반찬인 고로 물이 많고
건지는 약간 넣고 고춧가루를 조금 쳐서
상에 놓느니라(고기 없이 그냥 해도 좋으니라).”
말하자면 얼른 낸 소고기육수를 바탕 삼아서도 냉국을 했다는 뜻이다. 실은 여기서 더 떠올릴 데가 있다. 장조림을 하면, 고기만 귀하지 않았다. 장조림 국물이 못지않게 귀했다. 냉국의 간에 장조림 국물로 간을 하면? 맛난 맛이 한껏 부푼 냉국을 말 수 있었다. 그 맛의 설계와 추구가 서로 통한다. 전에는 그랬다 치고, 오늘날에는 어떨까? 오이의 사촌 참외, 여름의 상징 토마토, 여름 한순간의 진객 살구 등등은 냉국의 부재료로, 고명으로 더한 쓸모가 있다. 살짝 밑간한 이들 과일, 과채가 어울린 냉국이라. 이렇게 하면 눈으로 먼저 먹기 즐거운 냉국을 말 수 있다.
냉국은 한반도의 여름 농사가 낸 온갖 것을 잘 쓰며 태어난 음식이다. 또한 갈무리해 두었던 바다의 것을 여름답게 쓰는 음식이기도 하다. 지금 내 텃밭에는, 우리 고장에는, 우리 동네 시장에는 냉국에 어울릴 어떤 작물이며 식료품이 나와 있을까. 거뜬히 한번 나가 보자. 걸으며 흘린 땀은, 냉국 말며 난 땀은 또 냉국으로 들이면 그만이다.
➊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 https://folkency.nfm.go.kr/main
필자 소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