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갑산 자락 깊고 맑은 물과 따뜻한 햇살이 가득한 충남 청양. 패스트푸드로 점령당한 우리 밥상에 깊은 장맛과 발효의 이로움을 전하기 위해 나선 이들이 있다. 국내산 원재료와 기다림의 정성으로 완성한 전통 장류를 만드는 아름다운 나라의 농부, 아나농을 찾아가 본다.
어머니의 꿈을 키운 딸의 도전
여유 있는 식사 시간조차 사치로 느껴지는 바쁜 현대인들의 일상은 어느새 패스트푸드로 점령당했다. 패스트푸드의 반대 개념인 슬로푸드를 대표하는 발효식품마저 패스트푸드화된 지 오래다. 우리가 시중에서 흔히 사 먹는 양조간장은 긴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고 메주 대신 탈지 대두박과 밀 등으로 양조장에서 빠르게 발효시켜 만든다. 혼합간장을 만드는 과정은 발효와 더 동떨어져 있다. 염산 등을 써서 콩단백질을 인위적으로 분해시켜 만든 산분해간장에 양조간장을 섞어 뚝딱 만든다. 이런 간장을 ‘한국의 맛’이라 할 수 있을까? 김민솔 대표는 전통 방식을 재현해 제대로 만든 전통 장으로 한국의 맛을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2012년 어머니가 먼저 귀농해 장류 사업을 시작했어요. 어머니는 귀농 전에도 집에서 장이나 효소 등 발효식품을 담그길 좋아하셨는데요. 발효에 정말 진심이라 발효효소지도자 자격증을 따기도 하셨어요. 아버지의 은퇴 시기가 가까워지면서 농촌에서 인생 2막을 펼치고 싶다던 어머니의 오랜 소망을 충남 청양에서 펼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업주부였던 어머니에게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어요.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건 파는 일이었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겨울에 휴식 차 청양에 내려왔는데, 어머니께서 애써 만들어 놓은 된장을 판매하지 못하고 지인들에게 나눠 주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된장을 제값에 팔고, 더 많은 사람에게 맛보여 주고 싶어 청양에 눌러앉기로 결심했어요.”
당시 김민솔 대표의 나이는 스물셋에 불과했다. 원래 교사가 꿈이었지만 어머니를 도와 메주를 쑤고 장을 담그면서 몸을 쓰며 땀 흘리는 즐거움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틈틈이 제품을 만드는 일을 돕는 한편, 홍보와 판로 개척에도 힘썼다. 제품 사진을 찍어 인터넷 카페에 소개하고, 펀딩에도 참여했다. 일러스트와 포토샵 프로그램을 배우고, 방산시장이나 백화점을 다니며 제품 용기와 디자인 등을 벤치마킹했다.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그런 열정과 진심이 통했는지 입소문을 타고 판매량이 점점 늘기 시작했다. 청양을 비롯한 지역 로컬푸드 직매장에도 입점할 수 있었다.
“학교급식에 출하를 하면서 사업이 안정화되기 시작했어요. 학교급식 출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는데, 공장을 짓고 사업자 등록을 내는 과정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판넬을 구입해 삼촌들과 직접 공장을 세웠고, 배수 시설과 창문 공사를 했어요.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지만 가족과 함께 땀 흘린 시간이라 더 기억에 남습니다.”
스물셋이던 청년은 이제 서른둘이 되었다. 세월이 흐른 만큼 많은 것이 달라졌다. 어머니 홀로 내려와 지내던 산자락 집터에는 두 채의 집이 생겼다. 이모와 이모부가 합류해 일손을 보태고 있고, 퇴직을 미루던 아버지도 곧 청양으로 내려올 예정이다.
“처음에는 ‘요즘 누가 전통 된장을 먹냐’며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어요. 하지만 이제 주변 모든 사람이 적극적으로 응원해주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살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고등학생 때부터 타지 생활을 해 부모님과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았는데,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져 행복합니다.”
지역 농업인의 땀과 아나농의 정성으로 만든 결실
현재 아나농이 자리한 전체 부지는 9,917㎡로 그 안에 공장은 198㎡ 규모로 운영하고 있다. 공장에 들어서면 일곱 개의 큼직한 가마솥이 맨 먼저 눈에 띈다.
“콩을 수확하는 가을부터 봄까지 가장 바쁜 시기인데요. 이모와 이모부는 물론 충남 청년 농업인들과 동네 주민들이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모두 전통 방식을 고수하고 있기에 손이 많이 가고 긴 시간이 소요됩니다. 가마솥에 콩을 삶는 데만 7시간이 걸리지요. 가마솥이 아닌 다른 장비로 콩을 삶는 곳도 많이 봤는데요. 콩이 익어가면서 내는 빛깔조차 다릅니다. 참나무 향이 가득 배어들면서 황금빛 갈색으로 익거든요. 콩 삶기부터 풍미가 달라지지요.”
메주를 빚어 띄울 때도 인위적으로 균을 뿌려 발효를 촉진하지 않는다. 자연의 균으로만 오랜 시간 천천히 발효해 깊은 맛을 만든다. 간장은 3년, 고추장은 1년 이상 발효와 숙성을 거치는 것이 아나농의 원칙이다. 이처럼 전통 방식을 고수할 뿐만 아니라 작은 재료 하나까지 국내산 재료만을 고집하는 것도 맛과 풍미를 높이는 비결이다.
“점점 기술과 과학은 발전하고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먹거리는 건강한 식탁과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이 전통 장에 대해 관심을 갖고, 어른이 되어서도 ‘참맛’을 기억하고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될 수 있는 한 청양을 비롯한 충남 지역 청년 농업인이 판매하는 농산물을 구입해 재료로 쓰고 있어요. 직접 재료를 보아야 안심이 되고, 지역 농업인과 상생해야 함께 발전할 수 있다고 믿거든요. 그래서 시중 가격보다 10% 정도 더 높은 가격으로 구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늘 품질 좋은 원재료를 공급받고 있기 때문에 농업인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아깝지 않습니다. 특히 고추는 주변 농가를 통해 두세 번째 수확한 고추만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씨가 적고 과피가 두꺼울 뿐만 아니라 단맛이 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농업인의 땀과 아나농의 정성을 합쳐 만든 된장과 고추장, 간장을 꼭 한번 맛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나농의 연간 고추장 생산량은 5~6톤, 된장 생산량은 4톤가량이다. 같은 방식으로 생산하더라도 숙성 기간과 항아리 내부 위치에 따라 장의 색이나 수분 함량, 염도 등이 달라질 수 있다. 이 때문에 때때로 ‘맛이 달라진 것 같다’는 후기가 올라오는 경우도 있다.
“맛이 달라진 것 같다거나 제품 용기가 잘 열리지 않는다는 불편 사항을 처음 들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불편 사항도 애정이라고 느낍니다. 소비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전통 장의 가치를 지켜 나가다
최근 김민솔 대표는 더 바빠졌다. 식품과 발효에 대해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기 위해 다시 대학에 입학해 식품영양학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면서 그동안 알고 있던 발효 지식이나 인터넷을 통해 익힌 정보들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궁금했던 것들도 해소가 되고 있습니다. 식품이나 발효 원리 외에 장류 산업의 발전 방향성 등에 대해서도 배우고 있고요.”
김민솔 대표는 앞으로 유아용 저염 된장과 수출용 상품을 개발하고 싶다는 포부를 비쳤다.
“남녀노소, 나라와 인종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장류 제품들을 선보이고 싶어요.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꿈입니다. 충남에는 청년 농업인이 몇 안 될뿐더러 대부분 벼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에 협업이 어렵습니다. 더 많은 귀농 청년 농업인이 전통 장의 가치를 잇고 농업·농촌이 발전하는 데 힘을 보탰으면 합니다.”
전통 장을 알리기 위한 김민솔 대표의 노력은 아나농 밖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청양과 공주, 내포 등 학교를 찾아 된장과 고추장에 대해 가르치고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 행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직접 고추장을 만들 수 있는 키트도 판매한다.
“점점 기술과 과학은 발전하고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먹거리는 건강한 식탁과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이 전통 장에 대해 관심을 갖고, 어른이 되어서도 ‘참맛’을 기억하고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소비자에게 ‘어릴 때 먹던 어머니 손맛이 생각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는 김민솔 대표. 할머니에게서 어머니로, 또 어머니에게서 딸로 세대를 이어가는 ‘맛’의 가치는 세월이 쌓여갈수록 깊어질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햇간장을 담글 때 잘 숙성된 씨간장을 넣어 기존 간장 맛의 균형과 향을 지켜왔다. 김민솔 대표와 아나농이 우리 전통 장의 원형을 지키는 씨간장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
대표 제품
3년 숙성 콩된장 100% 국내산 콩을 가마솥에 삶아 3년간 항아리에 숙성시키는 전통 방식으로 만든 된장. 일반적인 재래식 된장에 비해 짠맛과 쿰쿰함이 적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찹쌀 고추장 가장 품질이 좋은 청양산 두세 물 고추만 넣어 만든 고추장. 밀가루 대신 찹쌀가루를 사용하고 물엿 대신 조청을 넣어 칼칼하면서도 단맛이 적어 깔끔한 맛을 자랑한다. 12개월 이상 숙성으로 감칠맛까지 담았다.
전통 국 간장 메주를 듬뿍 넣고 3년간 발효시켜 색이 짙고 농도가 진해 달콤한 향기가 난다. 일반 재래식 간장에 비해 짠맛과 쿰쿰함이 적고, 적은 양으로도 음식 맛을 제대로 살려준다.
주요 판매처
네이버 스토어 인터넷 오픈마켓, 청양·공주·대전 로컬푸드 직매장, 서울 상생상회 등
문의 041-943-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