土卵

구황작물에서 가을 보약으로

토란

수확의 계절 가을과 함께 추석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점점 커지는 일교차에 말간 토란국 한 대접이 떠오른다. 푹 고아낸 소고기 양지머리 육수에 동글동글 알토란을 넣어 담백하게 끓인 토란국은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여린 순부터 잎과 줄기, 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토란. 구황작물에서 가을 보약으로 그 위상이 크게 바뀐 토란의 연대기를 살펴본다.

: 키움의 힘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토란은 보험이었다

“준치는 비옥한 땅에다 심음 직하지(蹲鴟宜沃野)/

흉년에는 곡식 대신 먹을 수 있는 작물(荒歲可代穀)/

우리 집 농토에서는 이 농사가 제일이라(我圃最重此)/ (중략)

움에 묻으면 썩지 않고(深窖藏不爛)/”

아궁이 재 속에 묻으면 잘도 익네(地爐煨易熟)/

두고두고 한 해 내내 먹을 테니(留作歲暮計)/

도인의 살림이 이쯤으로 충분하다마다(道人生事足)/”

장유, <농촌의 가을 정취를 읊은 네 수[田家秋興四首]> 가운데 토란 부분

토란의 맛이 들 대로 든 즈음이다. 예전에는 서울경기와 삼남의 여기저기에서 토란은 참으로 요긴한 작물이었다. 조선의 문인 장유(張維, 1588~1587)가 읊은 대로였다. 오늘날은 별미에 기울어졌지만, 전근대 사회에서 토란의 의의는 또 달랐다. 수확과 갈무리를 끝낼 때까지 낙관할 수만은 없는 게 전근대의 주곡 농업이다. 주곡은 주곡이고, 토란과 같은 작물은 보험 삼아 따로 가꾸어 마땅하다. 여차하면 메밀을 뿌려 두 달 만에 거두는 순발력을 발휘할 수도 있지만, 보다 안심하고 수확을 기다릴 만한 작물은 아무래도 땅속 작물이다. 감자와 고구마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한반도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데에는 토란의 경험도 큰 역할을 했을 테다. 토란의 경험이 있었기에, 감자와 같은 덩이줄기며 고구마와 같은 덩이뿌리를 안심하고 심었을 테다. 토란에 견주어 감자나 고구마의 땅속 생육을 믿을 수 있었을 테다.

너의 이름은

별미 이전에 구황작물이었던 토란. 그 이름은 문헌 속에서 갖가지다. 먼저 장유의 시에서 보듯 ‘준치(蹲鴟)’라는 어휘가 있다. 말이 어렵다. ‘올빼미[鴟]가 웅크린[蹲] 모양’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약 2,000년 전의 역사서 『사기(史記)』에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사기』는 토란[蹲鴟]이 나는 땅이라면 “굶어 죽을 일은 없다(至死不饑)”라는 당시의 말을 기록했다.또 어떤 말이 있을까? 그냥 ‘우(芋)’ 딱 한 글자로도 쓴다. 이 글자는 땅속에서 캐는, 전분 품은 덩이줄기와 덩이뿌리 일체를 일컫는 말이다. 그 대표가 토란이었다. 또는 가뭄을 견딘다고 해서 ‘한우(旱芋)’라고도 했다. 덩이를 이루고 있는 모습에서 온 말은 ‘우괴(芋魁)’이다. 사람의 머리에 빗대서는 ‘우두(芋頭)’라고 했다. 여담이지만 유럽 감자 보급 초기에는 감자가 사람의 얼굴과 닮아 보인다고 해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인식은 실제로감자 보급의 걸림돌이었다.

또한 토란은 물기를 많이 품는다고 해서 ‘수우(水芋)’라고도 했다. 대체로 토란의 성분은 수분 7에 전분 3이다. 토란잎은 어떤가. 연잎과 닮았다. 그러니 ‘토련(土蓮)’이라고도 했다. ‘지(芝)’를 붙이면 ‘토지(土芝)’이다. ‘지’는 상서로운 느낌을 주는 풀과 버섯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작물 가치를 콩에 견주면 ‘토두(土豆)’이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토란이 아니라, 감자를 ‘토두’라고 한다. 감자와 토란을 헷갈린 동아시아 감자 연대기가 이렇게도 토란에 깃들어 있다. 그러다 오늘날의 한국어에서는 ‘토란(土卵)’이 가장 우세한 말로 쓰이고 있다. 동글동글하니 그야말로 달걀 모양으로 전분 품은 덩어리, 그게 토란이다.

문헌 속에서

다시 문헌으로 들어가보자. 토란은 한마디로 전근대의 모든 사람에게 반갑고 정다운 작물이었다. 캐고 거두어 갈무리하는 사이에 안도감을 주는 작물이었다. 조선 전기의 문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여러 채소와 함께 토란을 이렇게 노래했다.

“우리 집 남새밭 몇 이랑 남겨(我園中有數畝餘)/

해마다 넉넉히 채소 따위를 심네(年年滿意種佳蔬)/

배추, 무, 상추(蕪菁蘿蔔與萵莒)/

미나리, 토란, 차조기(靑芹白芋仍紫蘇)/

생강, 마늘, 파, 여뀌로 오미를 갖추어(薑蒜蔥蓼五味全)/

데쳐서는 국 끓이고 절여서는 김치 담그지(細燖爲羹沈爲葅)”

서거정, <남새밭을 돌보며[巡菜圃有作]>에서

조선 후기 허균(許筠, 1569~1618)의 기록도 흥미롭다. 허균은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토란. 호남과 영남의 것이 좋고 아주 크다. 서울 쪽에서 나는 것은 맛은 좋지만 작다.(芋. 湖南嶺南皆好而極大. 洛下味好而小)”라고 썼다. 팔도의 토란을 두루 먹어본 사람에게는 지역마다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는 작물이 또한 토란이었다.

버릴 게 없는 토란, 한국인은 다 먹는다

이렇게 고맙고 정다운 작물을 한국인은 갖가지 방식으로 먹었다. 한국인이 식물의 땅속 전분에만 매달릴 리 없다. 떡과 국수는 기본이다. 여린 순과 잎은 나물로, 쌈으로 먹었다. 토란대는 어떤가. 토란대볶음은 집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해 먹는다. 기름에 볶는 조리법으로 다가 아니다. 수분에 지지듯이 볶을 수도 있다. 간장으로 밑간해 말끔하게 볶는가 하면 고춧가루 양념을 더해 바특하게 볶기도 한다. 조림도 좋고 장아찌도 좋다. 들깨즙과 어울린 토란대 들깻국의 운치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해안과 제주의 고등엇국과 조림, 방어국과 조림, 그리고 영남부터 중부 지역까지 널리 끓이는 육개장과 육개장 계통의 국탕 등에도 토란대는 정말 잘 어울린다. 토란대 된장국도 개운하다. 전국적으로는 덩이줄기를 쓴 토란국이 익숙할 테다. 토란국은 옅은 된장국으로 끓여도 좋고, 맑은장국으로 끓여도 좋다. 19세기 말의 조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는 깨끗이 씻은 토란을 흘떼기, 무와 함께 푹 끓이다 간장으로 간하는 토란국을 싣고 있다.

토란국 사랑은 특히 서울·경기 쪽에서 유별났다. <동아일보> 1927년 10월 21일 자에서, ‘추석 무렵이 되면 조선에서는 토란국을 많이 먹고 서울 장안에는 어느 집을 막론하고 대개 다들 토란국을 끓여 먹는다’ 하는 기사를 쓸 정도였다. 모두 토란에서 풀리는 전분기와 토란 특유의 풍미를 알뜰하게 써먹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토란은, 잎부터 줄기, 그 덩이줄기, 덩이줄기에서 받은 전분 모두를 다 잘 쓸 수 있는 작물이다. 감자와 고구마가 들어오기 전에는 감자와 고구마를 합친 만큼의 구황작물이었고, 아울러 계절의 별미였다. 이른 추석을 맞아 토란의 연대기가 더욱 정답고도 각별하게 다가온다. 반갑다, 토란아!

토란은 덩이줄기이다. 또 다른 아메리카 원산의 작물 낙화생(落花生) 곧 땅콩은 캐지만 열매이다.

힘줄이나 근육 사이에 박힌 고기. 얇은 막이 섞여 있다.

필자 소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