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매운맛

고추 연대기

고추는 우리 음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식재료로서 김치, 젓갈, 고추장 등 양념거리는 물론 무침, 조림, 장아찌 같은 나물로도 사랑받는다. 고추가 한국인의 매운맛으로 자리 잡기까지 여정을 따라가 보고,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가 찾고 느낀 매운맛의 다채로운 속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 키움의 힘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 또한 이곳에는 아히(aji)가 많으며, 이는 그들의 후추로서

후추보다 더 가치가 있다. 모든 사람이 아히 없이는

식사하지 않고 이것이 매우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며,

에스파뇰라섬에서 매년 카라벨[caravel, 삼각돛을 단 소형 범선]

50척에 실을 수 있을 것이다”

1492년 8월 새 항로와 금은, 향신료를 찾아 스페인 팔로스항을 떠난 콜럼버스 선단은 대서양을 건너 오늘날의 카리브해역으로 들어간다. 그때까지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 사람들에게는 미지의 세계였던 아메리카에 진입한 것이다. 콜럼버스는 와틀링섬 [Watling’s Island]에 처음 상륙해 원주민과도 마주친다. 선단은 다시 쿠바섬, 에스파뇰라(Española)섬 등을 탐사한다. 위 기록은 콜럼버스가 남긴 항해 일지 중 1493년 1월 15일자에 기록된 한 대목이다. 여기 보이는 원주민 말 ‘아히’가 바로 고추이다. 이 한 줄이, 고추가 메소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밖을 넘어 세계에 알려지는 역사적인 순간의 기록이다.

온 지구에서 아메리카로, 아메리카에서 온 지구로

고추는 대륙과 해양을 가로질러 참 멀리서 왔다. 고추의 원산지는 멕시코 고원에서 페루 중북부 산악에 걸친 지역으로 추정한다. 고추는 원산지를 중심으로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재배를 시작해, 오늘날 그 남쪽 고산지대의 문명 속에 자리 잡았다.

아메리카에서도 고추를 부르는 말은 각각이었다. 메소아메리카에서는 ‘칠레(chile)’ 라고 했다. 카리브해역의 섬과 남아메리카에서는 ‘아히’라고 했다. 스페인어에는 두 말이 다 남았고, 영어에는 스페인어 칠레에서 온 ‘칠리(chili)’가 남았다.

고추는 유럽 사람들의 손에 들어간 이래, 자연스럽게 유럽 전역으로, 지중해 사방으로, 서남아시아와 인도로, 중국으로, 그리고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일본으로 온 고추는 다시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다다랐다. 그러고 보니 감자, 토마토, 옥수수, 단호박, 강낭콩, 땅콩, 고구마, 카카오, 담배 등도 오로지 아메리카에만 있다가 온 지구로 퍼진 자원이다. 이전에 없었던 대두, 오렌지, 바나나, 사탕수수, 커피 등 아메리카에 없었던 것들은 거꾸로 아메리카로 들어갔다. 이윽고 온 지구 농업과 먹을거리의 역사가 싹 바뀌게 되었다.

한반도에 뿌리내린 고추

한국인에게, 고추는 어떤 존재인가? 한마디로 김치, 젓갈, 고추장에서 빠뜨릴 수 없는 양념거리이자 향신료다. 게다가 고춧잎무침, 고추잡채, 고추김치, 고추찜, 고추부각, 고추조림, 고추장아찌 등에서 보듯 당당한 나물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 농업에서는 쌀 다음으로 돈이 되는 2대 경제작물이기도 하다.

고추는 언제쯤 한반도에 이르렀을까?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로 본다. 해외에서 들어왔기에 이름도 갖가지였다. 만초(蠻椒), 남만초(南蠻椒), 번초(蕃椒), 왜초(倭椒), 왜개자[倭芥子, 왜겨자], 당초(唐椒) 등등 부르자니 숨이 차다. ‘만’과 ‘번’은 접경 및 그 너머를 뜻하고, ‘왜’는 일본을 가리키고, ‘당’은 수입품과 박래품을 뜻한다. ‘초’는 향신재를 뜻한다. ‘왜개자’ 는 ‘일본에서 온 겨자 비슷한 사물’을 뜻한다. 여러 말 가운데 ‘고초(苦椒)’가 ‘고추’로 변해 우리 일상생활과 한국어에 남았다. 이수광(李睟光, 1563~1629)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보고 넘어가자. 이수광은 이렇게 기록했다.

“남만초에는 센 독이 있는데, 일본에서 들어와 왜겨자라고 한다.

지금 종종 심는다. 술집에서는 그 매운맛을 이용해

소주에 타서 파는데, 마시고 많이들 죽는다.”

역시 고추는 누구와 만나든 매운맛으로 인상을 남긴다. 한반도에서도 들어오자마자 향신재로 인식되었고, 바로 재배로 접어들었음이 단박에 드러난다.

감각 속으로

고추, ‘고초(苦椒)’로 돌아가자. ‘苦’는 통증, 고통을 뜻한다. 특히 후끈! 발열 작용을 동반하는 감각이다. 요컨대 ‘매워서 열이 난다.’, ‘열이 나도록 맵다.’이다. ‘椒’는 향신료로 쓰는 열매 일체를 가리킨다. 그런데 한국인에게 있어 고추 감각은 그냥 ‘발열과 통증’만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구체적으로 맛을 느낄 때 ‘맵다’는 어떤 감각인가? ‘맛이 알알하다/기운이 사납고 독하다/눈과 코를 아리게 하다’ 등을 다채롭게 품은 감각이다. 고추는 ‘매콤’하기도 하다. 알알하다/얼얼하다/알싸하다 등의 감각이다. 요컨대 매콤하다는 ‘맵거나 독하여 혀끝이 약간 아리고 쏘는 느낌이 있는’ 감각이다. 고추는 사람의 입안이나 코를 벌레 물린 듯 자극하곤 한다.

이때 한국인은 ‘톡 쏘네!’라고 말한다. 입안에서 목구멍을 지나며 느끼는 상대적으로 약한 자극성은 ‘칼칼하다’이다. 입안이 조금 얼얼할 정도로 매우면 ‘얼큰하다’라고 한다. 입안이 얼얼한 듯하면서 시원하면 ‘화하다’라고 한다. 한국인은 고추에서 이런 감각을 끄집어내 적재적소에 배치하며 식생활을 만들어왔으며, 여전히 만들고 있다.

단순하지 않다

한편 한국인은 고추에서, 얼큰함 속의 개운함도 찾아냈다. 고추와 함께하는 시원함은 호쾌함, 상쾌함, 청량감에 잇닿은 감각이다. 개운함이란 무엇인가? 상쾌하고 가뜬함/산뜻하고 시원함/깨끗하고 맑은 느낌 덕분에 환기되는 상쾌함이다. 감각을 뒤집어보자. 미처 충분히 받아들이기도 전에 밀어닥치는, 지나치고 부담스러운 기름기 및 기름진 느낌을 ‘느끼하다’라고 한다. 느끼함을 잡을 때는 단연 고추다. 시원함은 어떤가. 지나치게 차지 않고 알맞게 서늘하다/탁 트인 데서 후련한 느낌을 받다/말과 행동이 서글서글하다/답답함이 풀려 만족감을 느끼다/음식이 차고 산뜻하다 등의 감각이다. 한국인이 얼큰한 국물 한 사발을 들이켜고 ‘어, 시원하다!’ 할 때의 시원함이란 ‘따끈함이 속을 후련하게 하다’, ‘속이 풀리다’의 뜻이다. 익히 맛보던 파, 마늘, 생강 계통의 아린 매움과는 길이 전혀 다른 감각이요 쓰임이다.

고추 덕분이었다. 양념, 젓갈, 식해, 김치가 맛있는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서민들도 누구나 쓸 수 있는 고마운 향신료를 하나 더했다. 돼지갈비찜과 제육볶음과 떡볶이와 비벼 먹는 국수 종류의 상전벽해 또한 새삼스럽다. 그렇게 된 지 이제 300년이 될까 말까다. 그럼에도 다채로운 감각, 미각이 한반도 고추 연대기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그러니 살짝 아쉽다. 오로지 ‘캡사이신’ 하나에 의지하는 감각 말이다. 이 계절, 발갛게 잘 익어가는 고추, 마르고 있는 고추 앞에서 고추의 다채로운 속성을 떠올린다. 맛있게 매운 속의 매콤함, 칼칼함, 얼큰함, 화함, 개운함, 시원함 등등의 미덕을 다시 떠올린다. 고추의 쓰임새를 새삼스레 떠올린다.

오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지음, 바로톨로메 데라스카사스 엮음, 정승희 옮김, 『콜럼버스 항해일지[Diario de a bordo]』, 나남, 2022. 이 자리를 빌려 한국어판 작업을 해낸 번역자께 경의를 표한다.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건너 처음으로 상륙한 섬의 이름을, 그곳 사람들의 말로 ‘과나아니(Guanahani)’라고 기록했다. 콜럼버스는 그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로 이름했다. 한때 바하마 제도의 캣섬[Cat Island]을 콜럼버스의 첫 상륙지로 여겼으나 나중에 와틀링섬[Watling’s Island]을 콜럼버스의 첫 상륙지로 비정해, 1925년부터 와틀링섬을 당시의 과나아니로 정정했다.

오늘날의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가 자리한다. 프랑스어 지명은 ‘이스파니올라(Hispaniola)’이다.

오늘날의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의 북서부 일대, 공통의 문화를 지닌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원문은 이렇다. “南蠻椒有大毒, 始自倭國來, 故俗謂倭芥子. 今往往種之. 酒家利其猛烈, 或和燒酒以市之, 飮者多死.” 인터넷에 잘못 인용한 원문이 많이 돌아다녀 굳이 원문을 밝힌다.

필자 소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