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풍미를 더하다

청정 지역 펀치볼에서 찾은
구수한 시래기의 옛 맛

해발 400~500m 고지대에 위치한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해안 분지인 이곳은 화채(Punch) 그릇(Bowl)을 닮은 지형 때문에 한국전쟁 시절부터 ‘펀치볼’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마을 곳곳마다 설치된 덕장에는 빼곡하게 널린 무청이 겨울바람을 맞을 채비 중이다. 겨우내 해풍을 맞고 잘 마른 무청은 명품 시래기로 소문난 ‘펀치볼 시래기’로 거듭나게 된다. 올가을 비무장지대(DMZ)와 맞닿은 양구의 청정 자연을 따라 걸으며 찬 바람이 불수록 더 깊어지는 옛 맛을 찾아가 보자.

자연 속에서 무장 해제되는 마음

강원 양구 최북단에 위치한 해안면 펀치볼 지역은 해발 1,100m 이상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현재 1,7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 위치한 면이다. 한국전쟁 당시 펀치볼 전투, 도솔산 전투, 가칠봉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로 곳곳에 전적비와 지뢰 푯말이 세워져 있어 전쟁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게 한다.

전쟁 이후 펀치볼 지역은 오랫동안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어 천혜의 자연을 오롯이 보전해 왔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던 미지의 길을 걷는 건 어떤 기분일까? 자연이 오랜 시간 소중하게 품어 온 아름다운 경관을 오롯이 만끽하고 싶다면 ‘DMZ펀치볼둘레길’로 트레킹을 추천한다. 2021년 산림청에서 우리나라 국가 숲길 1호로 지정한 ‘DMZ펀치볼둘레길’은 매년 1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힐링 명소이다. 민간인출입통제선 내에 조성된 숲길로 미확인 지뢰 지역과 인접해 반드시 ‘숲나들e’ 사이트에서 예약해야 하고 숲길 체험지도사와 동반해야 탐방이 가능하다. 정해진 길 외에 조금만 벗어나도 미확인 지뢰 지역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둘레길은 총 73.22㎞ 길이로 평화의 숲길, 오유밭길, 만대벌판길, 먼멧재길 등 4개의 탐방로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평화의 숲길에서는 와우산 전망대와 자작나무 숲, 대형 벙커 등 군사분계선 상징물을 볼 수 있다. 장장 네 시간에 걸쳐 숲길을 걸으며 전쟁의 흔적들을 지나치는 동안 우리가 지금 일상에서 누리는 평화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느낄 수 있다.

다음은 오유밭길이다. 다섯 시간 정도 소요되는 코스로 동막동과 오유 저수지, 야생화 공원, 소나무 쉼터, DMZ자생식물원, 선사 유적지 등을둘러볼 수 있다. 특히, 2016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된 DMZ자생식물원은 흔히 볼 수 없는 북방계 식물들과 DMZ 지역에만 분포하는 희귀 식물을 보존하고 있다. 너도개미자리, 넌출월귤 등 이름조차 생소한 식물들이 자라는 이곳은 그야말로 ‘비밀의 화원’이다. 하얀 억새가 바람에 일렁이는 식물원의 가을 풍경 속에서 자연 그대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특별한 경험을 해 보자.

만대벌판길은 다섯 시간 반 코스로 만대마을과 DMZ자생식물원, 서낭당, 만대 저수지, 강송 조립지, 먼멧재숲길로 이어진다. 성황당을 지키는 보호수 졸참나무를 볼 수 있고, 대암산 자락의 능선과 계곡을 걸으며 소나무 조림지 아래로 만대 평야의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먼멧재길은 전차 방호벽, 먼멧재봉, 군헬기장, 서화 옛길, 지뢰밭길 등을 지난다. 후리 자작나무 숲을 지나 지뢰밭길을 통과하여 대암산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금강산과 무산, 운동, 스탈린 고지 등 지금은 갈 수 없는 북녘 산하가 펼쳐진다. 이와 함께 설악산, 점봉산, 향로봉 등 남쪽의 산봉우리가 어우러진 장관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긴장된 마음이 순식간에 무장 해제된다.

찬 바람 불수록 맛있어지는 시래기와 사과

DMZ펀치볼둘레길을 오르는 동안 눈길을 끄는 것은 자연 경관이나 야생동물의 흔적만이 아니다. 산길을 오르다 보면 곳곳에서 지뢰 주의 표지판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전쟁의 아픔을 갖고 있는 땅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자연은 반세기에 걸친 시간 동안 수많은 생명을 잉태하며 그 상처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전히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4월에도 칼바람이 불고 된서리가 내릴 정도로 일교차가 큰 펀치볼 지역은 전통 방식으로 시래기를 건조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 중 열에 아홉은 시래기 농사를 짓는다. 보통 강원도에서는 11월이 되면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데 이곳은 무청을 수확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수확한 무청은 덕장에서 겨우내 바람을 맞으며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자연 건조를 거친다.

과거 시래기는 먹을 것이 부족할 때나 먹던 구황작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건강식으로 정평이 나 있다. 무청을 건조하면 식이섬유는 3~4배로 늘어나고 철분도 많아 빈혈 예방 효과가 있다. 또한 비타민도 풍부하다. 최근에는 암 억제 효과가 밝혀지면서 주목받는 식재료다.

펀치볼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시래기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였다. 고랭지 무와 배추, 감자 등을 주로 재배했으나 연이어 장해로 새로운 소득작물이 필요했고, 시래기를 대표 농특산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과 함께 시래기용 무 품종 개발에도 성공했다. 일반 무와 달리 시래기 원료인 무청만 무성하게 자라고, 영양소가 무청에 집중되어 식이섬유와 비타민 함량도 높은 품종이다.

이제 펀치볼 지역은 명실공히 ‘시래기 본고장’으로 불린다. 시래기 전용 품종에 일교차가 큰 날씨까지 더하니 맛과 영양 면에서 견줄 곳이 없다. 이와 함께 시래기밥, 시래기 소불고기 시래기 강된장, 시래기 고등어조림 등 다른 곳에서 맛보기 힘든 향토 음식도 주목받고 있다. 특유의 구수하고 담백한 맛과 향은 투박하지만 정겨운 옛 맛을 기억하게 한다.

담백한 시래기밥 하나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관광객이 몰려오는 사이, 펀치볼의 명성을 잇는 또 하나의 특산물이 떠오르고 있다. 바로 아삭한 식감과 새콤달콤한 맛을 자랑하는 고랭지 사과다. 현재 펀치볼 지역은 기후 변화로 인해 사과 주산지가 북상하면서 사과 재배 농가가 꾸준히 늘고 있다. 서늘한 기후와 일교차는 명품 시래기뿐 아니라 명품 사과도 만들어냈다.

한편, 양구군에서는 해마다 10월 지역 특산물인 펀치볼 시래기와 사과를 홍보하기 위해 ‘양구 펀치볼 시래기 사과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원래 펀치볼 시래기에 집중해 기획되었으나 2022년부터 사과를 더하기 시작했는데, 현재 곰취축제, 배꼽축제와 함께 강원도를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올해는 ‘시래기를 사랑한 백설공주’를 주제로 10월 26일과 27일 양일 간 열릴 예정이다. 다채로운 공연과 체험을 비롯해 펀치볼 시래기와 사과 등 지역 농특산물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자.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서 몸도 마음도 움츠러지는 지금, DMZ펀치볼둘레길을 걸으며 청정 자연과 호흡하고 담백한 시래기밥과 달콤한 사과로 잃었던 활력을 되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펀치볼이라는 이름처럼 맛과 멋을 모두 담고 있는 강원 양구로 지금 떠나보자.

양구 맛집, 여기 어때?

강원도 양구 특산품인 펀치볼 시래기는 찬 바람에 장기간 자연 건조해 몸에 좋은 영양분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또, 일반적인 시래기보다 식감이 부드러워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영양만점 펀치볼 시래기로 만든 요리로 옛 맛을 추억하며 건강을 챙겨보자.

1. 시래원

시래기 요리 전문점으로 농촌진흥청에서 지정한 농가맛집. 시래기 소불고기 정식 한 가지 메뉴만을 판매하며 한돈 떡갈비를 추가로 주문해 곁들일 수 있다. 반찬으로 나오는 마른 김에 청어알, 시래기밥을 곁들여 싸 먹으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말린 시래기와 삶은 시래기도 판매한다.

  • 주소양구군 국토정중앙면 봉화산로 457
  • 운영 시간11:00~20:00(화~목요일은 16:00까지)
  • 문의0507-1334-4201
2. 시래정

시래기밥과 함께 숯불 돼지갈비, 시래기 코다리조림, 시래기 고등어조림, 고등어구이 등을 선택해 함께 즐길 수 있는 강원도 으뜸식당이자 모범음식점. 비법 비빔장을 넣고 슥슥 비벼 먹는 담백한 시래기밥이 입맛을 돋운다. 겉절이와 호박전, 더덕무침, 시래기 강된장 등 풍성한 밑반찬도 시래정만의 자랑거리이다.

  • 주소양구군 양구읍 황강길 16-23
  • 운영 시간11:00~20:00
  • 문의033-481-6616
3. 백토미가

시래기와 불고기라는 독특한 조합의 메뉴로 허영만의 백반기행 등 여러 매체에 소개되었다. 특히 시래기 소불고기는 된장에 청양고추를 더해 칼칼한 국물맛이 일품이다. 이 외에도 시래기 소갈비찜, 시래기 돌솥비빔밥 등 다양한 요리로 시래기를 즐길 수 있다.

  • 주소양구군 방산면 장거리길 17
  • 운영 시간10:30~21:00
  • 문의033-481-5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