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한 해가 저물고 동지를 코앞에 두고 있다. ‘동지’ 하면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음식이 있다. 바로 ‘팥죽’이다. 오래전 우리 조상들은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으며 나쁜 기운을 씻고, 일 년 동안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이제는 그 의미가 퇴색되어 그저 겨울 별미로 여겨지고 있을 뿐이지만, 이웃과 나눠 먹던 팥죽 한 그릇 속에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었음을 잊지 말자.
양력 12월 22일 또는 23일에 돌아오는 동지(冬至)는 한 해 가운데 밤이 가장 긴 날이다. 그런데 동지를 지나면 낮이 밤보다 길어진다. 동지는 한마디로 ‘0시’이다. 어둠이 가장 깊은 날, 밝음이 움튼다. 뒤이어 소한(小寒)과 대한(大寒)을 지나 입춘(立春)이 돌아온다. 옛 동아시아에는 ‘동짓날 한밤중에 양의 기운이 땅을 뚫고 나온다’ 하는 관념도 있었다. 동지는 ‘끝나면서 시작하는 날’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동지에 지금보다 더한 의미가 부여되곤 했다. 중국 고대 주(周)나라에서는 동지가 곧 새해 첫날이었다.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사람들은 동지를 ‘아세(亞歲)’ 곧 ‘작은설’로 쳤다. 동지는 설날에 버금가는 날이었다.
고대 태양신 숭배의 전통이 있는 곳에서는, 동지는 태양의 생일이었다. 고대 달력에 따라 12월 25일이 동지인 지역도 있었다. 예컨대 옛 페르시아 태양신 미트라의 생일이 12월 25일 동지였다. 로마제국 황제 아우렐리아누스(Lucius Domitius Aurelianus, 214~275)는 서기 274년 미트라의 탄생일을 국경일로 선포했다. 로마제국은 12월 21일부터 31일 사이에 농업의 신을 받들어 축제를 열었는데, 그 가운데 12월 25일 동지를 태양이 ‘부활’하는 날로 기념한 것이다. 부활을 연역해보자. 동지는 로마가톨릭 기독교회와 마르틴 루터 및 장 칼뱅 이후의 기독교회 모두가 지키는 성탄절의 기원이다.
옛 한반도에서는 관청에서나 상인이나 동지 전에 새해 달력 인쇄를 마쳤다. 새해는 생활의 감각 속에서 이미 시작됐고, 그믐과 함께 공식적인 새해 첫날인 설이 막 다가오니, 달력은 동지 즈음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 풍경을 고려 사람 이곡(李穀, 1298~1351)은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새해 달력 파는 소리(聽取街頭賣新曆)”라고 읊었다. 재밌게도 이 시 「동지(冬至)」는 “문 두드리며 팥죽을 보내온 앞집 사람(扣門送粥自南隣)” 때문에 시 속의 화자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한다. 한반도 동지팥죽의 연원이 이렇게 깊다. 또 다른 고려 사람 이색(1328~1396)은 동지에 맛본 팥죽을 이렇게 노래했다.
동짓날 우리나라 풍속은 팥죽을 짙게 쑤지
冬至鄕風豆粥濃
비췻빛 사발에 가득 담으니 하늘빛마저 아롱지고
盈盈翠鉢色浮空
여기다 꿀을 타 목구멍 적셔 내리면
調來崖蜜流喉吻
나쁜 기운도 다 씻고 배 속도 윤택해지고
洗盡陰邪潤腹中
이색은 또 다른 시 「동지(冬至)」에서는 팥죽의 미각을 이렇게 노래했다.
“올해 이 시절 또한 지난해처럼 좋아서(今年比似前年好)
유지방 같은 팥죽이 푸른 사발에 한가득(豆粥如酥翠鉢深).”
보신 대로다. 한 해가 저물 때, 새해가 바라보일 때, 그래도 팥죽 한 그릇이 내 앞에 있어서 마음이 푸근했다. 동지에 팥죽이 있는 풍경은 조선 시대로 이어졌다.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서울 지역 민속을 기록한 책 『경도잡지(京都雜志』에다 “이날 팥죽을 쑬 때 찹쌀가루로 새알을 만들어 죽에 넣고 먹을 때 꿀을 탄다. 팥죽은 문짝에 뿌려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라고 썼다. 유득공 못잖게 서울의 민속을 열심히 기록한 홍석모(洪錫謨, 1781∼1857)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다 이렇게 썼다. “동지를 ‘작은설[亞歲]’이라고 하여 팥죽을 쑨다. 찹쌀가루를 쪄 새알 모양으로 만든 떡을 팥죽 속에 넣는다. 여기다 꿀을 타 계절의 별미로 먹으며 차례에도 쓴다. 팥죽을 문에 뿌려 액을 막기도 한다.”
보신 대로 동지팥죽에는 어느새 찹쌀경단인 새알심이 껴들기 시작했다. 죽은 목구멍을 쉬이 넘어가는 음식이다. 여기 새알심이 있으면 그저 흘려 넘길 뿐만 아니라 가볍게 한 번 씹는 순간이 생긴다. 먹는 재미도 운치도 더한다. 팥죽과 단맛이 잘 어울린다는 감각 또한 위에서 보신 것처럼 오래되었다. 팥죽에 단맛을 더하는 또 다른 방식도 있었다. 조선의 지식인 여성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 1759~1824)는 가정 경영서 『부인필지(婦人必知)』에 팥과 함께 대추를 고아 팥죽에 단맛과 풍미를 더하는 방식을 기록해 남겼다.
한겨울뿐인가? 팥죽은 한여름에도 좋은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홍석모는 또 다른 문헌에서 “쌀과 팥즙을 솥에 쑤어(米香豆汁煮鍋鐺)/복날이면 붉은 팥죽 맛을 보네(庚日輒看赤粥嘗)”➊ 라고 노래했다. 팥죽은 해장에도 좋았다. 문장 좋기로 유명한 조선 문인 장유(張維, 1587~1638)는 고기에 해산물에 기름진 음식 등을 곁들여 과음하고는 새벽부터 팥죽을 찾았다. 그가 속을 풀자고 들이켠 팥죽은, 팥을 푹푹 삶아 밭쳤으되 쌀 알갱이는 온전히 살아 있었다. 부드럽기는 유지방 같았다. 그런 팥죽에 꿀까지 타 마시고 나니 이렇게 숙취가 사라졌다. “서리 내린 아침 석청➋ 탄 팥죽 한 사발(霜朝一盌調崖蜜)/따듯하니 속 풀어지고 몸은 절로 편안해(煖胃和中體自安).” 그런데 이 시의 제목이 재밌다. 길지만 읽어보자. 「아침에 일어나 팥죽을 먹고 그냥 읊다, 이색의 시를 흉내 내어[晨起喫豆粥漫吟效牧隱體]」. 장유는 이색이 남긴 팥죽의 시, 팥죽의 노래를 읊조리며 팥죽도 마시고 해장도 했다는 말이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이어 오늘날에 이른 팥죽과 동지팥죽은 한국인의 일상생활 속에서 여전하다. 물론 동지팥죽을 둘러싼 일상생활의 조건과 맥락은 예전과 오늘이 다르다. 팥죽의 붉은빛에 기댄 ‘밝음’의 상징성이라든지, ‘액’으로 통칭되는 나쁜 기운을 막아낸다는 관념은 거의 사라졌다. 오늘날의 동지팥죽은 이색이 맛본 팥죽 못잖게, 한겨울 배속을 윤택하게 하는 매력적인 별미의 의의가 제일번이다. 그런 가운데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하나 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동지에 팥죽 한 그릇 못 쑤어 먹는 집이 있으면, 남몰래, 어디에도 소문 내지 않고, 받는 사람이 무안하지 않도록 그 집에 팥죽을 전해주었다. 동지에는, 동지처럼 별미가 뒤따르는 날에는, 응당 그래야 한다는 가르침이 음식과 함께 전해왔다. 마음은, ‘소문내지 않는 마음’으로 마음먹어야 하는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웃까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끓인 팥죽이란, 따듯한 마음과 인간적인 예의까지 담는 한 그릇이기도 했다.
➊서울 지역의 일 년 열두 달 세시풍속을 한시로 읊은 시집 『도하세속기속시(都下歲時紀俗詩)』에 실린 시 「두죽(豆粥)」에서. 복날 먹는 팥죽을 ‘복죽(伏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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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