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과학자들의 서재
2밀리미터 작은 곤충 사회에서 배우는
공정과 공생의 지혜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생명자원부 유전체과

이태호 농업연구관

자연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공 사례는 꽃을 피우는 식물과 그들을 방문해 꽃가루를 옮겨주고 그 대가로 꿀을 얻는 곤충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지구상의 모든 동물과 식물, 곤충은 서로 협력하고 희생하는 관계 속에서 거대한 생태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지금 인간의 이기심이 이 거대한 질서를 뒤흔들고 지구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생의 기술이다. 이는 비단 자연 생태계뿐 아니라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데도 꼭 필요하다. 이태호 농업연구관의 추천 도서 『최재천의 곤충사회』를 통해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찾아본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으로 만드는 농업의 미래

2023년 농촌진흥청에서는 농업과 생명·보건 분야에 초고성능 컴퓨팅 기반을 제공하기 위한 ‘농생명 슈퍼컴퓨팅센터’를 준공했다. 사업비 148억 원이 투입된 센터는 총 면적 2,057㎡에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초고성능 슈퍼컴퓨터 2호기가 있다. 원래 기상청에서 사용하던 슈퍼컴퓨터 4호기를 관리 전환 받은 것으로 일반 컴퓨터 3,600대에 달하는 성능을 자랑한다. 슈퍼컴퓨터 2호기 도입과 센터 건립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안정적인 운영을 위한 센터 건립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규모가 큰 예산을 확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현재 센터장을 맡고 있는 이태호 농업연구관의 열정 덕분에 무사히 개소할 수 있었다.

“2018년 슈퍼컴퓨터 1호기를 도입했지만 최근 급증하고 있는 농생명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관련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1호기보다 성능이 29배 높은 2호기를 도입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빅데이터를 활용한 디지털 육종을 비롯해 스마트팜, 기후 변화 예측, 작물 병해충 조기 진단, 유전체 빅데이터 분석, 질병 진단 모델 개발 등 농생명 분야 연구 개발 지원이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슈퍼컴퓨터란 전 세계에서 성능이 상위 500위 안에 드는 컴퓨터를 말한다. 일반적인 컴퓨터로는 3,024가지 유전체를 갖고 있는 벼 1종 분석이 6개월 이상 걸리는 반면 2호기는 4일이면 충분하다.

“농촌진흥청에서 근무하기 전에는 미국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작물 유전체 연구를 진행했어요.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생명정보학 분야에 슈퍼컴퓨터를 활발히 사용하고 있는데요. 우리나라는 농업을 위한 슈퍼컴퓨터가 없어 빅데이터 분석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2호기 도입으로 나날이 디지털화 되어 가는 농업 연구를 보다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어요. 농생명 슈퍼컴퓨팅센터가 문을 열던 날 정말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앞으로 한국 농업 디지털화의 핵심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이태호 농업연구관은 이제 걸음마 단계인 국내 농업 분야 슈퍼컴퓨팅 기술과 인프라를 확대해 국가 농업 경쟁력을 크게 도약시키는 것을 장기적인 목표로 세우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유전체 정보만으로 작물의 표현체를 예측하는 딥러닝 기반 인공지능 모델을 개발해 육종 기간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다.

“전통 육종으로는 종자를 다 키우기 전에는 형질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또, 원하는 형질을 육묘 단계에서 골라낼 수 있는 분자지표인 분자마커를 활용한 분자육종 기술은 다양한 형질을 동시에 파악하기는 힘들다는 단점이 있지요. 하지만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면 복잡하고 다양한 형질을 빠른 시간 안에 분석해 원하는 형질을 가진 종자를 선발할 수 있습니다.”

공동 활용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고추 849여 자원의 유전체 빅데이터 분석을 외부 연구소에서 요청받았는데, 일반 컴퓨터로는 27개월 이상 걸려 연구가 무산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슈퍼컴퓨터를 활용해 불과 2주 만에 분석을 끝낼 수 있었다.

“앞으로 대학과 연구소 등을 중심으로 지원·협력 체계를 갖춰 나가며 다양한 유전체 정보와 표현형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할 계획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소비자 맞춤형 작물이나 기후 변화 대응 작물 등을 육종하는 등 응용 범위를 넓혀 나가겠습니다. 올해는 벼 수발아성 예측 모델 개발 등 다양한 목표와 계획을 갖고 있으니 많은 기대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자연과 인간이 맞잡은 손에서 시작되는 지속 가능성

이태호 농업연구관을 농업 과학자의 길로 이끈 것은 대학 시절 지도교수와 나눈 짧은 대화였다. 벼를 연구하던 스승에게 연구 이유를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세상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고.

“우리나라에 중요한 작물이기 때문이라거나 모델 식물이라서라는 대답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순간 1차원적인 이유만 생각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농업의 위대함과 농업 연구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됐지요. 이후 자연스럽게 농업 과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현재 농생명 슈퍼컴퓨팅센터에서는 이태호 농업연구관을 비롯해 농업연구사 3인이 한 팀으로 일하고 있다. 슈퍼컴퓨터를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온도 관리 등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2호기는 기상청에서 관리 전환 받은 모델인데, 기상청에서 운영했던 관리 인력만 10인 이상이었다고. 그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인원이지만 기기 관리부터 기술 개발, 센터 홍보까지 다양한 업무를 소화하고 있다.

“팀원들에게 ‘아무리 바빠도 스스로 발전하고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발전하지 않는 사람은 퇴보하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요. 저도 통섭적 시각을 갖고 성장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 책을 읽는 편이에요. 특히 과학의 토대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과학의 의미를 파악하는 분야인 철학에 관심이 많습니다. 최근 감명 깊게 읽은 책은 『최재천의 곤충사회』인데요. 생명정보를 다루는 농업 과학자로서 생물 다양성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인간이 생태계 일원으로서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최재천의 곤충사회』는 곤충을 중심으로 자연 생태계로부터 배워야 할 경쟁과 협력, 양심과 공정을 이야기한다. 또한 기후 위기가 심화되고 생물 다양성이 빠르게 고갈되는 지금 자연과 공생하는 생태적 전환이 인류에게 주어진 과제임을 강조한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습니다’라는 맺음말 제목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모든 생태계의 기본은 결국 다양한 형태의 손잡음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서로 잡은 손을 놓지 않는 것이 생태계 유지의 핵심 아닐까요?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예요. 사회가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손잡은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어야 하고, 그 기본은 공정과 공생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팀만 해도 그래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 속에서도 개인적인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면서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손을 놓지 않고 함께 간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손을 잡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든다는 점이에요.”

최재천 교수는 ‘인간은 유전자의 관점에서 원천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으므로 자연을 착취하며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현명하게 생각하면 그냥 착취하는 것보다 자연과 손잡고 사는 게 유리하다는 걸 발견한 것도 인간’이라고 역설한다.

“꽃을 피우는 식물은 자연계에서 무게로 가장 성공한 존재라고 합니다. 숫자로 가장 성공한 존재는 곤충이고요. 그렇다면 인류는 무엇으로 자연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태호 농업연구관의 물음에 감히 ‘기술’이라 답하고 싶다. 앞으로 슈퍼컴퓨터를 활용한 유전체 기초 연구와 디지털 육종은 단순히 농업·농촌의 위기를 극복하는 해결책에 머물지 않고 기후 위기 시대를 극복할 핵심 열쇠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태호 농업연구관이 우리 농업·농촌과 맞잡은 손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그 연결이 인류의 이기심이 빚은 거대한 변화를 이겨내고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길 희망한다.

이태호 농업연구관 추천도서
『최재천의 곤충사회』
최재천 지음 열림원

『최재천의 곤충사회』는 생태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 사회생물학자로서 통섭적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고 폭넓은 사회적 화두에 치열하게 목소리를 내온 최재천 교수가 쓴 인류 보고서이다. 2013년부터 2021년까지 진행한 여러 강연과 2023년 열림원 편집부와 진행한 인터뷰를 토대로 만들었다.

‘과연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까?’ 최재천 교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곤충사회를 비롯한 자연 생태계로부터 배워야 할 경쟁과 협력, 양심과 공정을 이야기한다. 기후 변화와 생물 다양성 감소로 인해 닥쳐올 어마어마한 미래에 대해서도 조명한다.

책 내용은 총3부로 나뉘어 전개된다. 1부는 최재천 교수가 유학을 떠나 생태학을 공부하고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로서 인간을 탐구하기에 이른 삶과 연구 이력을 풀어내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를 가로지르는 화두인 ‘양심’과 ‘공정’ 그리고 경쟁과 협력의 합성어인 ‘코피티션(Coopetition)’에 대한 최재천 교수의 사유와 함께 젊은 세대에게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서기를 권하는 진심 어린 당부도 담겨 있다. 2부에서는 인간과 다른 듯 닮은 사회성 곤충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깊이 들여다본다. 대표적인 사회성 곤충인 개미를 살펴보며 곤충의 지혜를 모방하고 다른 모든 생명과 지구를 공유하는 공생인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로 거듭나는 길을 모색한다. 3부는 곤충이 사라지기 시작한 지금, 인류에게 주어진 유일한 전환으로서 ‘생태적 전환’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인류에게 주어진 전환은 생태적 전환밖에 없습니다. (…)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명한 인간이라는 자화자찬은 이제 집어 던지고 호모 심비우스로서 다른 생명체들과 이 지구를 공유하겠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공생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 최재천의 곤충사회』 맺음말에서

최재천 교수는 ‘오랜 유전자의 역사 끄트머리에 우연의 확률로 생겨난 인간, 자신을 최후의 위험으로 몰아넣은 인간, 그러나 동시에 유일하게 유전자의 존재를 알고 탐구하는 인간,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자연을 곁에 두고 배우며 삶의 방식을 재정립할 수 있다’ 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그 동행이자 지침서로서 전 생명의 진화사를 함께 걸어온 엄연한 동물인 인간에게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선물하고 공존과 공생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환경과 곤충, 그리고 인간 사회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서로 손잡고 함께 나아갈 길을 찾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먼저 온 미래, 우리 농업·농촌. 농촌진흥청에는 농업과 농촌을 연구하며 기술을 보급하는 농업 과학자, 농업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농업을 과학으로 이끄는 선구자들입니다. 농업 과학자는 어떤 책을 읽고, 연구에 활용할까요? 농업과학기술 우수성과 공유대회를 통해선정한 농업 과학자들의 서재를 들여다봤습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