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 탐구

효종갱 曉鐘羹

새벽을 연 해장국의 흔적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

“효종갱(曉鐘羹). 광주(廣州) 성안 사람들이 잘 끓인다. 조리법은 배추속대를 주재료로 해서, 콩나물·송이·표고·쇠힘줄·양지머리뼈[陽骨]·해삼·전복에 토장을 풀어 온종일 곤다. 밤에 국항아리를 이불에 싸 서울 재상의 집에 보내는데 새벽종[曉鐘]이 울릴 무렵에 도착한다. 국항아리는 그때까지 따뜻하다. 술을 잔뜩 마시고 그 국을 마시면 달고 개운하고 풍미도 좋아 한 시대의 명물이었다. 어떤 이는 이 국을 가리켜 ‘북촌갱(北村羹)’이라고 한다.” 최영년(崔永年, 1859~1935), 〈해동죽지(海東竹枝)〉1 , ‘효종갱’ 항목에서

새벽같이 달려와 속을 달래는

조선 철종 때 태어나 식민지조선에서 생을 마친 최영년이 남긴 ‘효종갱’ 이야기가 이렇다. 읽고 있자니 남한산성 자락에 살던 사람들이 안쓰럽다. 경기도 광주에서 서울 문안까지는 직선거리로 27km도 넘는다. 게다가 강과 여울이 가로막혀 있다. 이 국 한 항아리 옮기던 사람은 0시쯤 길을 떠나 밤새 걸어야 했을 테다. 한편 ‘북촌갱’이라고도 했으니 북촌, 그러니까 오늘날의 서울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율곡로를 남쪽 끝으로 하는 잘사는 동네의 사람들이 받아 먹던 국이었나 보다. 또는 북촌의 ‘조시(朝市)’에서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나 보다. 예전 서울에는, 새벽아침 사이에 반짝 섰다가 도시의 일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철시하는 시장이 있었으니 그것이 조시이다. 매일 대도시에 공급되어야 하는 장작·푸성귀·어물 등이 조시에 반짝 모였고 당연히 아침을 일찍 연 사람들의 속을 달랠 죽이나 국밥도 있었다.2

해장에 제격

효종갱. 여기 쓰인 재료를 보자. 고급인 데다 다채롭다. 배추속대와 콩나물과 버섯은 그야말로 ‘시원함’을 만들어냈으리라. 한국어 ‘시원하다’의 내용은 ‘맺혔던 것이 풀려 후련하다’이다. 속이 풀려야 정신도 날 테니 술꾼에게 더욱 고마웠겠다. 여기 아울러 고기와 해산물의 감칠맛이 껴든다. 된장은 맛의 바탕을 마련한다. 그야말로 달 테고, 담박하면서도 개운하겠다. 한 사발 후딱 비우면 수분을 금세 몸속에 채울 수 있겠다. 자꾸 당기는 감칠맛이 깃들었으니 맹물 억지 넘기듯 할 필요가 없다. 술 잔뜩 마시고 아침에 국이라니, 병 다음에 약이라니. 여기서 ‘해장국’이라는 말을 들여다본다. 해장국은 술 마시고 나서, 숙취를 풀기 위해, 또는 술에 시달려 거북해진 속을 풀기 위해 먹는 국탕을 일컫는 말이다. 특정한 국탕이 해장국이 아니라, 숙취 또는 거북한 속에 부어 넣는 국탕이 다 해장국이다.

‘해장’은 한자어 ‘해정(解酲)’에서 왔다. 말 그대로 ‘숙취해소’라는 뜻이다. 문법을 따지면 ‘해정’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한국인의 숙취해소에서 속풀이는 그 핵심이다. 게다가 대중에게 ‘정(酲)’보다는 ‘장(腸)’에서 유추한 ‘장’이 쉽다. 자연스레 ‘해장’이 ‘해정’을 밀어냈다. 한편 〈노걸대(老乞大)〉에 나오는 ‘성주탕(醒酒湯)’에서 해장국이 유래했다 하는 소리도 돌아다닌다. 그런 소리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낭설이다. 〈노걸대〉는 조선 세종 때 편찬된 이래 판을 거듭한 중국어 학습서이다. 이 가운데 1670년판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에, 중국어 ‘醒酒湯’이라는 어휘에 ‘술깨오는탕’이라는 언해가 붙은 구절이 있을 뿐이다. ‘醒酒湯’은 술 깨자고 마시는 국탕을 일컫는 당시의 중국어 어휘일 뿐이다. 한데 효종갱도 그렇지 않은가. 그 말만 붙들고 있어서야, 들어본 적도 없는 새벽종 소리만 남아서야, 무슨 다른 기획을 할 수 있겠는가. 글쓴이는 몇 해 전 서울 지역의 해장국을 두루 살펴보다 〈해동죽지〉 속 효종갱 항목에 이른 적 있다. 아울러 문자 그대로 재료를 온통 때려 박고 종일 고면 매력적인 음식이 되겠는가 하는 의문도 떠올랐다. 이에 한식 제대로 하는 요리사부터 만났다. 요리사와 문헌을 펴놓고, 조리의 실제를 이야기하며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았다.

궁리는 이렇게 모였다. 현대 한식 요리사의 감각으로 효종갱을 다시 끓인다면? 그때 요리사는 아래와 같은 안을 내놓았다.

曉鐘羹

배추속대를 주재료로 해서 콩나물·송이·표고·쇠힘줄·양지머리뼈·해삼·전복에 토장을 풀어 온종일 곤다

  1. 된장 바탕이되 맑은 국에 건더기가 넉넉한 특징을 살린다. 다만 겹치는 재료는 빼도 좋다. 예컨대 해삼과 전복 가운데 하나만 골라 쓸 수 있다. 표고와 송이의 향이 부딪치지 않게 하나만 골라 쓸 수 있다. 표고와 송이의 향이 부딪치지 않게 하나만 골라 쓸 수 있다. 이는 요리사의 판단, 먹는 쪽의 기호, 재료 수급의 형편을 따른다.
  2. 바탕을 만들 때 된장, 배추속대, 콩나물은 반드시 쓴다. 여기서 국물 맛의 핵심을 마련한다.
  3. 밤새 푹 고면 재료 저마다의 식감 및 가장 좋은 풍미를 죽일 수도 있다. 대량의 재료를, 편차 없이 조리하려면 재료마다 접근을 달리하는 것도 방법이다.
  4. 에 이어 먼저 뼈가 붙은 소고기는 두 시간 정도 푹 삶아 뼈에서 살이 분리될 즈음에 건진다. 양지머리뼈는 국거리 소갈비로 대신해도 좋다. 배추속대도 계절에 따라서는 봄동을 쓸 수 있다.
  5. 나온 육수에 배추속대 또는 봄동을 데쳐 된장으로 살짝 무친다. 콩나물도 같은 방식으로 준비한다. 전복을 쓴다면, 육수를 깔고 가장 약한 불로 30분 쪄 준비한다. 훌훌 마시되 감칠맛과 씹는 재미를 주는 요소를 포기하기는 아쉽다.
  6. 된장은 나중에 육수에 넣고 푼다.
  7. 준비해둔 재료를 켜켜이 쌓고, 된장 푼 육수를 끼얹은 다음, 맨 마지막에 된장에 데친 송이를 얹는다. 그렇게 해서 향도 조형미도 함께 살린다.

이렇게 끓인 효종갱의 풍미는? 맛은?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술 안 마시고 마시기에는 아까운 국이었다는 후일담을 굳이 전해드린다. 다시 문헌으로, 〈해동죽지〉로 돌아온다. 최영년의 시대에 효종갱은 이미 지난 시대의 명물이었다. 유한신사(有閑紳士) 최영년이 남긴 성근 기록에는 재료의 나열이 있을 뿐이다. 조리의 실제와 세부는 없다. 누가 다시 효종갱을 끓여도 기록은 독해를 거쳐야 하고, 음식은 조리의 재구성을 거쳐야 한다. 만만한 노릇이 아니다. 어려운 작업은 어려운 줄 알고 달려들어 마땅하다. 고심해 해석하고, 고심해 기술의 세목을 살피고, 고심해 실제로 재구성하는 수고를 들일 때에만 진짜 상상력이 발휘된다. 그때에만 의미 있는 실험, 시도, 재현을 입에 담을 수 있다. 문헌 뒤지는 자가 굳이 독자 여러분께 번잡한 말씀 드리며 마친다. 농촌과 농업을 논하는 지면의 한 꼭지에서 차마 ‘먹방질’에 그친 말씀은 못 올리겠다.

  1. 1921년에 집필을 마치고 1925년 출판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 등이 소장하고 있다.
  2. 전근대 서울을 무대로 한 박종화(朴鍾和, 1901~1981)의 장편소설, 역사물 곳곳에 조시와 국밥이 어울린 풍경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