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농업을 만드는 손길
“치유농업 콘텐츠는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이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정순진 농업연구관은 아동·청소년, 경도 인지장애 어르신 등 다양한 대상에 맞춘 치유농업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정순진 농업연구관이 강조하는 치유농업 콘텐츠의 본질은 ‘필요 기반의 설계’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치유 방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르신에게는 인지 저하를 늦출 수 있는 감각 자극과 기억 회복 활동이, 청소년에게는 정서적 안정과 회복 그리고 진로 탐색을 위한 활동이 핵심이다.
“같은 허브를 활용하더라도 어르신에게는 힐링을 위한 아로마 파우치로, 청소년에게는 ‘꿈을 적어 넣는 책갈피’로 변주됩니다. 콘텐츠의 핵심 자원은 같아도, 대상에 따라 설계는 완전히 달라지는 거죠.”
그다음으로 중요한 건 ‘공간’이다. 대상자가 실제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먼저 확보돼야, 그에 맞춰 적절한 자원을 선정하고 프로그램을 설계할 수 있다. 공간의 크기나 환경에 따라 심을 수 있는 작물도, 활동 방식도 달라진다.

“공간을 먼저 확보한 후, 어떤 농업 자원을 재배할지 결정하는 것이 중요해요. 예를 들어, 공간이 3평이라면 넓은 면적이 필요한 작물을 심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작은 공간에서도 다양한 작물을 소규모로 재배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때와 작물의 재배 시기가 맞아야 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겨울철에 콩을 심겠다고 하면 현실적으로 어렵잖아요. 그래서 계절에 맞는 작물을 선정하는 게 핵심이고, 참여자의 농업 경험이나 신체적 조건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경험이 없는 대상자에게는 재배가 쉬운 작물을 추천하고, 허리나 관절이 불편하신 분들에겐 일반 텃밭보다는 의자에 앉아서 활동할 수 있는 쉼터형 공간을 구성하는 식으로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있어요.”
이처럼 프로그램은 치유 공간을 기반으로, 계절 작물과 농업 자원을 적절히 활용해 짜임새 있게 구성된다. 허브를 키워 허브차를 마시거나, 메리골드를 말려 천연 비누를 만드는 활동이 대표적이다. 이 모든 활동은 계절, 공간, 참여자의 특성을 고려해 맞춤형으로 설계된다. 정순진 농업연구관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과정’이다. 씨앗을 심고, 가꾸고, 수확하고, 그것을 다시 활동으로 연결하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치유농업의 진정한 힘이기 때문이다.

삶을 바꾸는 씨앗 하나
치유농업은 실제로 사람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 있을까? 정순진 연구관은 그 가능성을 수없이 많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사례를 연구하며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해오고 있다.
“연구기관으로서 항상 프로그램의 효과를 객관적으로 검증하려고 합니다. 그게 연구자의 책임이기도 하고요.”
2020년 12월 처음으로 정순진 농업연구관은 치매안심센터와 협력해 경도 인지장애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 치유농업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프로그램과 함께 그 효과를 검증하기 위해 센터에서 사용하는 공식 평가도구(MMSE-DS 등)를 활용해 인지 기능, 우울감, 자기 인지 수준 등을 정밀하게 측정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치유농업 전후를 비교한 결과, 우울감은 줄고 인지 기능은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어요. 당시 국립정신건강센터장님께서도 ‘이게 정말 가능한 결과냐’고 되묻기도 하셨어요. 그런데 뇌는 계속 자극을 주면 신경 연결이 살아나요. 학습도 마찬가지잖아요. 멈추면 퇴화하고, 자극을 주면 살아나는 거죠. 물론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인지 기능 점수가 향상된 것을 보았을 때, 치유농업이 경도 인지장애를 예방하는 데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처럼 치유농업은 ‘가능성’에 머무르지 않고, 눈앞의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 변화를 생생하게 목격한 경험도 있다.
“편마비로 거의 움직이지 않던 어르신이 계셨어요. 늘 프로그램을 지켜보시기만 했는데, 어느 날 ‘내 마음의 운동회’ 에서 직접 만든 콩주머니를 들고 박 터뜨리기에 참여하신 거예요. 얼굴이 달라졌어요. 손에 힘을 주고, 온몸으로 활동에 몰입하시더라고요. 당시 함께 계셨던 선생님들도 그 어르신의 변화를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저 역시 그 장면을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고 기뻤던 순간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치유농업이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건강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실감했던 순간이었어요.”
그날의 활동은 단순한 운동회가 아니었다. 씨앗을 만지고 분류하며 감각을 자극하고, 콩주머니를 만들어 소근육을 움직인 뒤, 모두가 함께하는 활동으로 마무리되는 치유 프로그램이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어르신의 변화가 그날 하루만의 일시적인 변화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1년 뒤 정순진 연구관이 다시 찾았을 때도 어르신은 여전히 활기차게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건강 상태도 상당히 호전되어 있었다.
이런 꾸준한 연구와 성과는 정책적 성과로도 이어졌다. ‘제17회 치매극복의 날 기념행사’에서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이번 표창은 치매 극복을 위해 헌신적으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여된 것이다.

치유, 통합적 관점으로 바라보다
정순진 연구관은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으로 『치유산업에서 길을 찾다』를 추천했다. 이 책은 치유산업을 보다 넓은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어, 치유농업 역시 보다 폭넓은 시야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치유산업은 결국 자연과 밀접하게 관련된 분야예요. 바다, 농촌, 산, 해양 등 다양한 요소가 모두 포함되죠. 이 책은 치유농업뿐만 아니라 이런 자연과 연계된 치유산업의 큰 그림을 그려줍니다. 각 분야가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국민이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진정한 치유가 이뤄진다고 생각해요. 치유농업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는 산업이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와의 연계가 반드시 필요하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보다 넓은 시각에서 치유산업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이 책은 정책 담당자뿐 아니라 현장에서 치유를 실천하는 연구자, 농장 운영자 모두에게 통찰을 준다. 부처별로 흩어졌던 치유 관련 제도와 현황들을 아우르며, 어떻게 하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통합적 치유 체계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치유농업은 단순한 체험이 아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삶에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씨앗이 될 수 있다. 정순진 농업연구관은 그 작은 씨앗이 언젠가 꽃이 되어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치유농업을 연구하고 있다.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치유산업에서 길을 찾다』
김재수 저|매일경제신문사

치유산업을 넓은 틀에서 조망하며 각 분야 간 연계의 필요성을 짚어내고 있어요. 특히 치유농업을 포함한 다양한 자연 기반 치유 분야를 통합적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어요. 기관마다 ‘우리는 치유농업만’, ‘우리는 산림치유만’ 하겠다는 태도는 사실상 부처 간 이기주의일 수 있어요. 하지만 국민의 삶은 그렇게 구분되지 않아요. 어디에 가든 사람이 있고, 농촌이 있고, 숲과 바다가 함께 존재하죠. 연구자뿐만 아니라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이들에게도 꼭 필요한 시각을 제시하고 있어요. 정책 입안자들이 이 관점을 이해한다면, 국민을 위한 더 나은 통합적 접근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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