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종 기술은 한 나라의 농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자산이다. 하지만 국내 육종 현장이 빠르게 고령화되면서,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도 함께 사라질 위기에 있다. 말로는 전할 수 없는 수십 년의 육종 기술을 다음 세대에 잇기 위해서는, 방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농촌진흥청과 민간 기업 디엔에이케어가 협력해 개발 중인 ‘디지털육종 플랫폼’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단순한 데이터 저장을 넘어 유전형과 표현형, 대사체 정보를 정밀하게 연계, 분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한, 플랫폼을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 디지털육종의 새로운 미래를 열고 있다.
유전체 분석, 농업 기술로 연결되다
디엔에이케어는 2017년 설립된 생명정보 분석 전문기업으로, 식물 유전체 분석과 이를 바탕으로 한 플랫폼 개발을 주력으로 하고 있다. 유의수 대표는 오랜 시간 동안 벼, 콩, 옥수수, 토마토 등 주요 작물의 유전체를 분석하며 기술력을 쌓아 왔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유전체 기반 농업 기술을 실현하고자 디엔에이케어를 창립했다.
“유전체 정보 분석은 식물이 가진 유전 정보를 해독해 농업에 활용하는 기술입니다. 예를 들어, 벼처럼 표준 유전체가 있는 작물은 일부만 시퀀싱(Sequencing, 염기서열 분석)해서, 기존 정보와 비교하면 큰 벼와 작은 벼의 형질 차이 원인을 파악할 수 있어요. 이를 통해 형질과 연관된 유전자를 찾고, ‘마커(Marker)’ 를 만들어 원하는 형질을 가진 개체를 빠르게 선별할 수 있어요. 이런 형질 연관 분석과 마커 개발은 유전체 분석의 대표적인 활용법입니다.”
디엔에이케어의 핵심 역량은 유전체 분석을 단순한 결과로 끝내지 않는 데 있다. 분석된 데이터는 체계적으로 데이터베이스화(DB)해, 수년간 축적된 연구 데이터를 정리하고 연계할 수 있도록 만든다. 실제로 지금까지는 연구자가 생성한 데이터를 개별적으로 보관하거나, 각자의 방식대로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데이터 관리가 어렵고, 연속적인 활용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디엔에이케어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엑셀 파일로 흩어진 데이터를 하나의 플랫폼에서 통합해 과거의 실험 결과와 현재의 작물 정보를 연결해 추적 가능한 구조를 만든다. 더불어, 분석 결과는 보다 ‘직관적’이고 ‘시각적’인 형태로 사용자에게 제공함으로써, 활용도를 높이고 있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디지털육종의 기반이 되는 데이터 환경 구축과 직결된다.
“연구자들이 오랜 시간 쌓아온 데이터가 정말 많은데, 한눈에 정리해 살펴보는 일은 쉽지 않아요. 하지만 DB로 잘 정리해 두면 과거에는 어떤 조합으로 교배를 했는지, 그 결과 어떤 개체가 나왔는지까지도 추적할 수 있습니다. 디엔에이케어는 이처럼 데이터가 연계되고, 시각화되며, 추적까지 가능한 시스템을 설계하고 구축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식물의 특성을 예측 가능하게 하는, 디지털 분석 도구
이러한 기술력은 농촌진흥청과의 디지털육종 플랫폼 개발 협업으로 이어졌다. 현재 디엔에이케어는 59개 품목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DB화한 뒤, 가시화할 수 있는 분석 툴과 연계해 통합 플랫폼을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 과정은 향후 디지털육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핵심 기반을 구축하는 일이다.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에서는 각 작목 기관의 담당자들과 협력해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내부 시스템으로 유입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 디엔에이케어는 이렇게 모인 데이터를 표준화하고, DB 구조에 맞춰 정리한 뒤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화하는 작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데이터를 표준화된 형태로 업로드할 수 있는 기능까지 개발을 완료했으며, 업로드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시보드도 구현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올해까지는 데이터를 안정적으로 축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디지털육종 플랫폼은 크게 유전형, 표현형, 대사체 데이터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유전형은 식물 개체가 가지고 있는 유전 정보, 표현형은 키나 크기처럼 눈에 보이는 형질, 대사체는 비타민과 같은 식물 내 특정 물질의 함량을 의미한다. 이러한 데이터는 각각으로 보면 단순한 수치에 불과하지만 서로 연계하고 조합한다면, 의미 있는 정보로 확장된다. 이를 위해 플랫폼에는 ‘형질 연관 분석’과 ‘형질 예측 분석’이라는 두 가지 핵심 기술이 탑재될 예정이다.
“형질 연관 분석은 특정 형질이 어떤 유전자랑 관련이 있는지 찾아내는 기능입니다. 예를 들어 키가 큰 식물을 선발하고 싶다면, 어떤 유전자가 그 키에 영향을 줬는지 분석해 그 유전자를 마커로 삼는 거죠. 마커만 있다면 이 식물이 키가 클 확률이 높은지 빠르게 확인할 수 있어요. 형질 예측 분석은 식물의 키, 열매 길이, 무게 등의 다양한 특성을 한 번에 예측해서 원하는 조건에 가까운 개체를 고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입니다. 아직은 기술이 초기 단계지만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고, 풍부한 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 활용을 통해 앞으로는 훨씬 더 정확한 표현형을 예측할 수 있게 될 거예요.”
형질 연관 분석은 특정 형질이 어떤 유전자랑 관련이 있는지 찾아내는 기능입니다. 예를 들어 키가 큰 식물을 선발하고 싶다면, 어떤 유전자가 그 키에 영향을 줬는지 분석해 그 유전자를 마커로 삼는 거죠.
데이터를 수집해, 첨단기술로 확장하는 농업의 미래
“무엇보다 의미 있는 건, 이제 농업 분야에서도 국가 차원에서 데이터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건 굉장히 큰 걸음이 시작된 거예요. 앞으로 5년, 10년, 데이터가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100년 치 데이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일기예보처럼 ‘내일 이 지역에서는 벼가 얼마나 자랄지’, ‘무슨 품종을 심어야 수확이 많을지’ 예측이 가능한 시대가 올 겁니다. 이제 개인의 육감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로 농사를 지어서는 안 돼요. 농가 소득이 줄어들면, 농업의 미래 자체가 위태로워지거든요. 앞으로 이 시스템이 연구자뿐만 아니라 농가, 육종가 모두가 활용할 수 있는 공공 인프라로 자리 잡는다면, 그 자체로 정말 큰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시스템은 특히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종자 산업 현장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평균 연령이 60~70대에 이르는 전통 육종가들은 수십 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주관적인 판단과 결정을 내려왔지만, 이러한 경험은 제대로 전수되지 못한 채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그래서 경험 중심의 육종 결정 방식에서 벗어나, 데이터 기반의 의사결정 구조로 전환하는 일은 농업에 꼭 필요한 변화다.
기후위기 시대에 디지털육종 플랫폼은 하나의 중요한 기회이자 대응 전략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 기술은 국민의 식탁과도 직결된다. 최근 배추와 사과 등의 가격이 폭등한 것도 결국 기후변화의 영향이었다. 만약 기후에 강한 품종을 예측하고 개발해 두었다면, 이는 단순히 좋은 종자 개발을 넘어 물가 안정과 안정적인 식품 공급이라는 실질적인 국민 체감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이처럼 디지털육종 플랫폼은 국민의 삶과 맞닿아 있는 미래 농업의 핵심 인프라다.
앞으로 디엔에이케어는 지금의 플랫폼을 ‘버전 1’으로 삼고, 지속적으로 사용자의 피드백을 기반으로 ‘버전 2’, ‘버전 3’로 고도화할 계획이다. 디엔에이케어가 추구하는 바는 명확하다. 스마트폰을 설명서 없이 사용할 수 있듯이, 누구나 설명서 없이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육종 플랫폼을 만드는 것. 미래 농업의 핵심 인프라로 작용할 디지털육종 플랫폼이, 이제 첫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