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의 작은 발효 공간, ‘한희순발효갤러리’에는 울외(큰 참외), 무, 차요테, 멜론, 오이로 만든 장아찌들이 있다. 언뜻 익숙해 보이는 이 장아찌들에는 특별한 비밀이 숨어 있다. 단순한 절인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시간’과 ‘손맛’이 녹아 있다는 것. 그 시간은 길게는 무려 3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맛은 바로 이 발효 시간과 한희순 대표의 정성이 깃든 손끝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고민과 실패로 만들어진 공간
한희순 대표는 서울에서 국내 상위 5% 고객의 집을 찾아가 요리를 하던 전문 요리사였다. 오랜 시간 현장에서 경력을 쌓아왔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다음 삶을 고민하게 됐다. 그 무렵, 부부가 낚시를 하러 자주 찾던 곳이 바로 연천이었다. 인적 드문 임진강 인근은 서울에서 보기 힘든, 청정 자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한희순 대표는 남편과 함께 도시를 떠나 연천으로 귀농을 결심하게 된다.
“처음 연천에 와서는 된장을 만들었어요. 직접 메주 다섯 가마를 쑤고, 된장을 담가 인터넷으로 팔아보려고 했죠. 당시에는 유통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인터넷도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았어요. 판로가 없어서 몇 년을 그냥 끌고만 갔죠.”
된장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여기에 발효에 적합한 ‘환경’ 조건까지 맞춰야 하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판매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한희순 대표는 본래 계획에 없던 식당을 지인들의 권유로 열게 됐다. 몇 년간 식당을 운영했지만, 애초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가 요식업이 아니었기에 결국 식당 문을 닫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방향성을 잡으며 선택한 것이 바로 ‘식초’였다. 하지만 식초를 만드는 일 역시 만만치 않았다.
“열심히 공부해 가며 식초를 만들었지만, 시골이라는 환경 특성상 누가 뭘 하는지도 잘 모르는 분위기여서 제품을 알리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농촌진흥청이나 농업기술원의 도움을 받아 식초 제조 기술을 배우기도 했지만, 막상 해보니 식초는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분야였어요.”
고민 끝에 한희순 대표가 선택한 것은 주박을 활용한 장아찌였다.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주박 장아찌 개발에 나섰고, 지금의 ‘한희순발효갤러리’는 그렇게 수많은 고민과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됐다.
결국, 그 길에서 한희순 대표는 다시 새로운 방향을 고민하게 된다. 그때 만난 것이 술을 만들고 남은 ‘주박(酒粕)’이었다. 주박은 술을 빚을 때 액체(술 또는 청주)만을 짜내고 남은 찌거기로, 부산물이지만 영양이 풍부하고 활용 가능성도 컸다. ‘이걸로 뭘 만들 수 있을까?’ 고민 끝에 한희순 대표가 선택한 것은 주박을 활용한 장아찌였다.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주박 장아찌 개발에 나섰고, 지금의 ‘한희순발효갤러리’는 그렇게 수많은 고민과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됐다.
시간과 손맛의 발효 미학
“주박은 발효를 돕는 역할을 해요. 곡물과 누룩으로만 만들어 첨가물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영양분을 100% 흡수할 수 있어요. 직접 다뤄보니 수분을 흡수하고, 짠맛을 중화해주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하더라고요. 일반 장아찌는 짠맛이 강할 수밖에 없지만, 주박을 활용하면 저염으로도 충분히 맛있는 장아찌를 만들 수 있어요. 물론 손이 많이 가긴 하지만, ‘저염’을 지향하기 때문에 이를 감수하면서 장아찌를 만들고 있습니다.”
공기가 들어가면 색과 맛이 쉽게 변질되기 때문에 눌러주고 덮어주고, 일일이 손으로 관리해야 한다. 그래서 발효는 말보다 손이 앞서는 일이다. 발효 장아찌에서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용기’다.
한희순발효갤러리에서 만드는 장아찌 울외, 무, 차요테, 멜론, 오이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품질이다. 맛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이기에, 원물 선별에도 분명한 원칙이 있다. 바로 ‘노지’에서 자란 것만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직접 농사를 짓거나 계약 재배를 통해 원재료를 들여온다. 특히 울외는 수확 후 하루 이상 둘 수가 없어, 한희순 대표가 직접 재배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장아찌 한 조각에는 재료를 키운 땅과 계절의 힘, 그리고 시간과 주인의 손끝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장아찌를 만드는 과정은 보기보다 손이 많이 간다. 수확한 열매는 곧바로 세척하고, 씨를 제거한 뒤 절이는 작업을 거친다. 이때 일부 작업에는 인력의 손을 빌리기도 하지만, 숙성과 발효만큼은 한희순 대표가 직접 맡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마다 손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재료의 양을 똑같이 맞춘다 해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중요한 과정은 제가 직접 도맡아 하고 있어요. 발효는 단순히 재료를 절이고 주박에 묻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장아찌가 잘 익으려면 햇빛을 피해 적절한 온도를 유지해야 하고, 발효에 필요한 당도도 맞춰져야 하죠. 일반적으로 당도는 23브릭스 정도가 안정적이예요. 일정한 비율로 혼합한 뒤, 몇 달에 한 번씩 상태를 점검하며 천천히 숙성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발효 기간이 길수록 장아찌의 맛은 더욱 깊어진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1년, 2년, 3년 숙성에 따라 장아찌의 풍미가 모두 다르다. 특히 무 장아찌는 숙성에만 약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듯 장아찌 발효는 단순히 ‘기다림’이 아니라,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손을 보아야 하는 정성의 과정이다. 공기가 들어가면 색과 맛이 쉽게 변질되기 때문에 눌러주고 덮어주고, 일일이 손으로 관리해야 한다. 그래서 발효는 말보다 손이 앞서는 일이다. 발효 장아찌에서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용기’다.
“오랫동안 항아리만 고집해 왔어요. 무겁고 관리가 힘들지만, 항아리에서 발효시킨 장아찌가 가장 맛있거든요. 최근에는 만드는 양이 많아지면서 항아리만으로는 감당이 어려워 특허받은 바이오 발효통을 일부 병행해 사용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저는 자식도 사랑으로 키우듯이 장아찌도 그렇게 돌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언제나 정성과 관심을 담아 장아찌를 만들고 있습니다.”
발효의 모든 것을 담은, ‘발효 갤러리’를 향해
서울에서 평생을 살아온 한희순 대표는 연천으로 귀농한 뒤, 어느덧 16년째 여성농업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발효라는 한 길 위에서, 여성농업인으로서의 꿈을 품고. 한희순 대표의 다음 목표는 분명하다. 손맛과 정성이 깃든 장아찌를 넘어, 발효의 과정을 ‘작품’처럼 보여주는 갤러리를 만드는 것이다.
“제품 만드는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어요. 그걸 하나의 그림처럼 전시해서, 발효가 얼마나 아름답고 정성스러운 작업인지 보여주고 싶어요.”
한희순 대표가 꿈꾸는 공간은 단순한 판매장이 아니다. 땅에서부터 손끝까지, 음식이 완성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담아내는 ‘작품 같은 공간’, 바로 진정한 의미의 ‘발효 갤러리’다. 그리고 이 큰 꿈을 향한 첫걸음은, 현장의 물리적 부담을 덜어줄 생산 자동화에 있다.
“3년 안에 공장을 지어, 생산 과정을 조금 자동화하고 싶어요. 저도 나이가 들고 있고, 2세대가 일을 이어가길 바라지만 제가 하는 일이 워낙 힘들다 보니 선뜻 나서지 않더라고요. 지금은 진공 포장 200개만 하려 해도 이틀이 걸려요.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물이 생기는데, 발효 장아찌는 또 물에 잠겨 있어야 특유의 아삭거림이 유지되거든요. 이런 점들을 고려해서, 일정한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반자동 기계를 들여 더 많은 사람이 한희순발효갤러리의 장아찌를 맛볼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발효를 예술로 보여주고 싶은 꿈, 그 꿈을 가까운 현실로 만들 기술적 기반까지. 한희순 대표는 지금, 이상과 실천이 나란히 걷는 길 위에서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한희순발효갤러리의 대표 상품
시간과 정성으로 빚은 주박 장아찌
술을 빚고 남은 주박을 활용해 만든 장아찌로, 저염으로도 깊은 맛을 줍니다. 첨가물 없이 곡물과 누룩만으로 발효되어 영양이 풍부하고, 입안에 감도는 부드러움과 아삭함의 조화가 일품입니다.
주박 장아찌 먹는 방법
1 참기름과 함께 간단하게
깨끗이 씻어 먹기 좋게 썬 뒤, 참기름 한 방울만 톡 떨어뜨리면 고소한 풍미가 살아납니다. 매콤한 맛을 좋아하신다면 청양고추를 곁들여도 좋습니다.
2 김밥 속 단무지 대신!
김밥 재료로 활용해보세요. 아삭한 식감이 김밥에 새로운 매력을 더해줍니다.
3 고기와 함께 곁들이면 금상첨화!
삼겹살처럼 고기와 함께 먹으면 느끼함을 잡아주기 때문에, 더욱 깔끔하고 풍부한 맛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