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농업과학자

연구를 향한
의지가 만든
세계 최초라는 결과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채소기초기반과

박미희 농업연구관

기후변화가 농업 현장을 뒤흔들고 있다. 채소가 제때 자라지 못하고 생리장해를 겪으며 상품성이 떨어지고, 그 피해는 농가의 소득은 물론 소비자의 식탁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박미희 농업연구관은 채소 생리장해의 원인을 밝히고 대응책을 찾아내기 위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채소 생리장해를 밝혀내고 대응책을 찾아가는 연구

기록적인 폭염과 폭우, 장기간 이어지는 장마와 가뭄처럼 이상기후가 일상이 되면서 작물의 생육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채소는 기후변화에 민감한 노지작물이라, 환경 변화가 생리장해로 연결되기 쉽다.

박미희 농업연구관은 이런 기후 스트레스에 대응할 수 있는 품종을 찾고, 생리장해의 원인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집중해왔다. 그중에서도 고추와 배추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며, 작물이 어떤 조건에서 어떤 장해를 겪는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고추는 보통 4월경 정식하는데, 이후 갑작스럽게 기온이 떨어지면 생육이 더뎌지거나 열매가 잘 맺히지 않는 저온장해가 발생할 수 있어요. 배추는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작물이라 보통 여름철에는 주로 고랭지에서 재배하지만, 최근에는 고랭지마저 기온이 상승하면서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상황이에요.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작물의 반응을 정확히 이해하고, 대안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박미희 농업연구관의 연구는 단순히 현상 파악을 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기후변화에 따른 품질 변화를 바탕으로 생리장해의 원인을 규명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과학적 기술을 개발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참외의 골갈변 문제를 해결한 ‘열수 처리 기술’이다.

‘K-멜론’의 품격을 지키기 위한 노력

참외는 우리나라 고유 작물로,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인의 여름을 책임져 온 대표적인 채소다. 많은 사랑을 받아온 만큼, 특히 성주 지역을 중심으로 재배 기술도 오랜 세월 축적돼 왔다. 최근에는 K-컬처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참외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하지만 수출 과정에서 발목을 잡는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흰색 골 부분이 갈색으로 변색되는 골갈변 현상이다.

“처음에는 갈변이 왜 생기는지도 몰랐어요. 실온에 두었을 때도 갈변이 생기니까,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변화인가 싶었죠. 그런데 0도, 2도, 4도, 6도, 7도, 8도 등 온도별로 하나하나 실험해 본 결과, 저온에 보관한 뒤 실온에 뒀을 때 갈변이 훨씬 심하게 나타나는 걸 확인했어요. 그제야 이 현상이 ‘저온장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박미희 농업연구관은 참외 과피 갈변 현상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현미경 분석과 유전자 분석을 진행했다. 그 결과 과실 표면을 덮고 있는 얇은 막인 ‘큐티클층’이 붕괴되면서 표피 조직이 손상되고, 이로 인해 갈변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특히 큐티클층이 두껍고 견고한 노란색 부분보다, 얇고 쉽게 손상되는 흰색 골 부분에서 갈변이 집중적으로 발생한다는 점도 함께 확인됐다. 결국 참외의 갈변은 단순히 보관 환경의 문제가 아닌, 유전적 특성과 맞물린 생리장해였던 셈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미희 농업연구관이 고안한 방법이 바로 열수 처리 기술이다.

“이 기술은 순수하게 물의 온도만 이용합니다. 45도에서 50도 정도로 데운 물에 참외를 짧은 시간 담갔다가 꺼내는 방식인데요, 잔류 약물 걱정도 없고, 안전성 면에서도 매우 우수하죠. 사실 이 아이디어는 수입하는 과일 처리 방식에서 착안했어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로 수입되는 망고나 일부 아열대 과일은 입국 전에 열수 처리를 거쳐 병해충을 억제한 뒤 통관됩니다. 과일을 따뜻한 물에 일정 시간 담갔다가 꺼내는 방식인데, 이 과정이 병원균 억제에 효과적이라 참외에도 적용해 본 거죠.”

열수 처리를 거치며 큐티클층 관련 유전자의 발현이 증가하고, 저장 후에도 큐티클층이 유지되면서 갈변 현상이 훨씬 덜 발생한다는 점도 입증됐다. 이 기술은 이후 토마토·파프리카 등 다양한 작물에도 적용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으며, 관련 논문을 통해 그 확장 가능성도 제시됐다. 무엇보다 이 연구는 ‘세계 최초’로 참외 갈변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한 사례로, 박미희 농업연구관에게도 개인 연구 인생 전체를 통틀어 애착이 가는 연구 중 하나다.

“이 과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 2018년이었는데, 그 해 제가 뇌종양 진단을 받았고 다음 해 수술을 받았어요. 정말 힘든 시기였지만, 연구의 끈을 놓지 않았고 끝까지 해냈죠. 그래서 이 연구를 통해 받은 여러 상들이 단순한 성과라기보다는, 그 시기를 견디고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던 제 자신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더 의미가 큽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 이유

힘든 시간을 지나오며 박미희 농업연구관은 연구자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의지’라는 믿음을 더 굳게 품게 됐다. 그래서 그는 후배 연구자들에게도 늘 이야기한다. ‘연구 현실에 실망할 때도 있겠지만, 연구하겠다는 마음만 있다면 길은 있다’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이제는 후배들을 향한 다정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고 난 뒤, 그 믿음은 더욱 단단해졌다.

“제목 그대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말이 요즘 시대에 꼭 필요한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지금 성과 중심의 경쟁 사회에 살고 있잖아요. 그런 가운데 ‘과연 누가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더라고요. 책을 읽고 나서 내린 결론은 강한 자가 아니라, 함께 잘 지내는 사람이 결국 살아남는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요즘 저는 ‘강해져야지’보다는 ‘이 사람들과 잘 지내야지’라는 믿음으로 일하려고 해요. 다정한 마음이 결국 함께 갈 수 있는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책에서는 유전적·진화론적 설명을 통해 왜 다정한 존재가 살아남는지를 풀어낸다.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이전 인류인 호모 에렉투스는 더 강하고 도구까지 잘 다루는 종이었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협동하고 친화력을 가진 덕분에 생존에 성공할 수 있었다. 고릴라의 짝짓기를 보더라도, 공격성이 낮고 친화적인 수컷이 짝짓기에 성공할 확률이 높다. 결국 다정한 ‘친화력’이 생존 전략이라는 의미이다.

“협업과 협력은 결국 다정함에서 출발하는 것 같아요. 혼자서는 멀리 갈 수 없지만 함께 가면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말, 정말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건 강함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잘 지내려는 마음 아닐까요?”

박미희 농업연구관은 여전히 하고 싶은 연구가 많다. 최근에는 채소의 생리기작을 영상 기반으로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작물의 생육 상태나 장해 반응을 영상으로 촬영하고 이를 표현형 데이터로 정량화한 뒤 생리장해 기작을 밝히거나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데 활용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는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장해 예측, 품종 비교, 환경 반응 분석 같은 연구로 확장해 현장 기술이나 디지털 육종에도 응용할 수 있는 연구를 준비하고 있다.

박미희 농업연구관이 힘든 시기를 지나면서도 여전히 연구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한 성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역할에 집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역할에는 후배 연구자를 이끌고 지지하는 일도 포함돼 있다.

“연구자로서의 방향성을 잃지 않고 좋은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는 일, 그게 지금 제가 해야 할 일 같아요. 그저 좋은 연구를 하고, 좋은 후배 연구자를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결국 사람을 품는 마음은 다정함에서 시작되고, 그 다정함은 함께 가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이어가는 박미희 농업연구관의 연구는 결국 더 많은 사람과 농업의 내일을 밝혀줄 것이다.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저자(글) · 이민아 번역 · 박한선 감수 | 디플롯

책에 이런 문장이 나와요. ‘감정을 잘 조절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사람일수록 마음의 이론이 더 발달되어 있다.’ 즉, 참을성 있고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도 뛰어나다는 건데요, 이걸 조직사회로 확장해보면 결국 우리가 자주 이야기하는 ‘협업’, ‘협력’이라는 것도 다정함에서 출발하는 것 같아요.
책에서는 또 ‘프렌들리리스트(Friendlylist) 유전자가 생존을 결정한다’고도 하거든요. 쉽게 말해, 결국 친화적인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거죠. 물론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이 많고 함께하기 어려운 사람보다는 조용히, 다정하게, 옆에서 함께 가는 사람이 결국 오래 남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다정함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고, 살아남기 위해서든, 행복하게 일하기 위해서든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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