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 탐구

편찬자 살아생전에
세상에 이름을 알린 책

규합총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

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저서로 〈빙하각시집〉 한 권, 〈규합총서〉 여덟 권, 〈청규박물지〉 다섯 권이 있다. 그 가운데 〈규합총서〉는 형수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이미 세상에 알려졌으니, 인척(姻戚, 혼인관계로 맺어진 성이 다른 친척)들이 곧잘 필사하여 세상에 전해졌던 것이다.1)

위의 글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편찬한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자신의 형수인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1824)를 기리며 쓴 〈수씨단인이씨묘지명(嫂氏端人李氏墓誌銘)〉2)의 한 구절이다. 빙허각 이씨는 조선 후기의 여성 지식인으로 남성 못잖게 학문을 닦았고, 자신의 업적을 남겼다. 그 가운데 〈규합총서〉는 시동생 서유구가 남긴 〈임원경제지〉에도 큰 영향을 끼친 문헌이다.

빙허각 이씨는 전주 이씨 집안의 따님이다. 아버지는 병조판서 등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한 이창수(李昌壽, 1710~?))이고 어머니는 진주 유씨(文化柳氏)로 〈문통(文通)〉 〈물명유고(物名類考)〉 등을 쓴 문자음운학의 대가 유희(柳僖, 1773년~1837)와는 사촌지간이다. 한편 태교에서 부성의 역할을 강조한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쓴 여성 지식인 사주당 이씨(師朱堂李氏, 1739~1821)가 그녀의 외숙모이다. 그녀의 오빠 이병정(李秉鼎, 1742~1804) 또한 한성판윤3)과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당대의 인물이었다. 부모는 그녀를 아들과 다름없이 공부시켰다. 이렇게 자란 빙허각 이씨는 열다섯 되던 1773년 세 살 아래인 달성 서씨(達成徐氏) 서유본(徐有本, 1762~1822)과 혼인한다. 두 집안이 다 소론(少論) 집안이고 3대에 걸친 교분이 있었으니 두 집안은 혼기가 찬 상대 집안의 자녀에 대해 서로 잘 알고 있었을 테다. 두 사람은 중매도 없이 바로 혼인에 이르렀다. 빙허각 이씨의 시가 또한 명문가였다. 시할아버지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보만재총서(保晩齋남긴 대학자이고, 시아버지 서호수(徐浩修, 1736~1799)는 영의정까지 지낸 문신으로 〈해동농서(海東農書)〉를 남겼다. 시작은 아버지인 서형수(徐瀅修, 1749~1824) 또한 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명고전집(明皐全集)〉을 남긴 인물이다. 시집간 빙허각 이씨는 남편 서유본과 금슬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 동지로 지냈다. 시할아버지 서명응과도 학문적 대화를 나누었다. 나이 어린 시동생 서유구에게는 다정한 형수였고, 게다가 가정교사였다. 서유구가 형수님의 죽음을 애틋해하며 그 일생을 정리한 글을 남긴 데에는 이만한 사연과 까닭이 있다.

서유구는 형님 서유본이 틈이 나면 형수 빙허각 이씨와 토론하고 시를 주고받았다고도 했다. 어린 시동생의 눈에도 형수님은 형님에게 “훌륭한 아내이자 좋은 벗이었다(逸妻也亦良友也)4).” 이뿐만이 아니었다. 시작은아버지인 서형수가 유배에 처해지고, 그 때문에 서유구마저 벼슬길을 떠나는 등 시집이 몰락5)하고 나서는 온 집안의 먹고사는 문제를 감당해낸 이가 또한 빙허각 이씨였다. 〈규합총서〉는 사대부가를 보존하고, 그래도 사대부가다운 최소한의 체면치레를 해내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그녀의 고심이 낳은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작업에 ‘규합총서’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빙허각 이씨의 배우자이자, 좋은 벗이었던 서유본이었다. 서유본은 그의 문집인 〈좌소산인집(左蘇山人集)〉6)에 실린 시 〈강거잡영(江居雜詠)〉의 주석에서 이렇게 밝혔다.

“나의 아내가 여러 책에서 간략히 (지식과 정보를) 뽑아 모아 항목을 나누었으니 시골 살림살이에 요긴하지 않은 것이 없고 특히 초목과 새짐승의 특성을 상세하게 다루었다. 이에 내가 책 이름을 총서라고 하였다. (후략)7)

‘규합(閨閤)’ 여성의 생활공간을 뜻한다. ‘총서(叢書)’는 여러 책의 내용을 골라 엮었다는 뜻이다. 서유본은 〈강거잡영〉에서는 아내의 공부와 글쓰기를 “산에 사는 내 아내도 동물자원에 주석하여(山妻亦解注蟲魚)/농촌경영까지 모르는 게 없구나(經濟村家也不疎)”라고 읊었다. 이와 함께 빙허각 이씨가 쓴 〈규합총서〉의 서문의 몇 문장을 읽어보자.

“기사(己巳, 1809년) 가을에 내가 동호(東湖, 뚝섬에서 오늘날의 옥수동에 이르는 한강) 행정(杏亭)에 집을 삼아, 집안에서 밥 짓고 반찬 만드는 틈틈이 우연히 사랑에 나가 보고 옛글이 일생일용에 절실한 것과 산야에 묻힌 모든 글을 구하여 보고 손길 닿는 대로 펼쳐보아 오직 문견을 넓히고 심심풀이를 할 뿐이었다. 옛사람이 말하길 ‘총명이 무딘 글만 못하다’ 하니, 그러므로 적어 두지 않으면 어찌 잊을 때를 대비하여 일에 도움이 되리오. 그래서 모든 글을 보고 그 가장 긴요한 말을 가려 적고, 혹 따로 자기의 소견을 덧붙여 유취(類聚, 항목별 편집) 다섯 편을 만드니... ”

서유구는 남은 논밭을 관리해 집안을 끌고 가며, 베치마를 꿰어 입고, 저당 잡은 어음을 붙들고 아등바등하던 형수의 모습 또한 묘지명에 기록했다. 그녀는 몰락한 집안의 농업경영자이자 가정경영자로 살았다. 어음이라니, 당연히 회계관리자 노릇까지 했다는 말이다. 덕분에 책만 읽던 남편은 계속해서 책만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즈음에 기억에 의존해 살림을 살다가는 내일을 도모할 수 없으리란 판단을 했을 테다. 이런 맥락 속의 ‘규합’은 단순한 ‘여성의 생활공간’ 일 수 없다. 한 집안의 주부가, 여성이기에, 여성으로서 접한 가정의 경영과 논밭과 임야와 거기 딸린 경제적 이익의 관리를 포괄하는 말이겠다. 타고난 총명함과 해온 공부가 어려운 시기에 ‘관리’라는 측면에서 꽃핀 책- 〈규합총서〉에는 이런 해제를 붙일 만도 하다. 쓰다 보니 지면을 넘쳤다. 이렇게 해서 이룬 〈규합총서〉의 이모저모와 거기 깃든 음식 이야기는 다음 연재분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1. 원문은 다음과 같다. “著有憑虛閣詩集一卷, 閨閤叢書八卷, 淸閨博物志五卷. 其閨閤叢書. 及端人在時, 已聞于世, 姻戚往往傳寫焉.”
  2. 수씨’는 형수를 점잖게 이르는 말이다. ‘단인’은 정팔품 문관과 종팔품 무관의 배우자에게 주던 품계이다. ‘묘지’는 돌아간 사람의 행적을 기록한 글이다. 이를 따로 사기 또는 돌 또는 관에 새긴 것을 ‘묘지명’이라고 한다. 빙허각 이씨의 남편 서유본은 집안 다른 사람들에 견주어 관운이 없었다. 첫 관직이 1805년 43세에 얻은 종9품 동몽교관이었다.
  3. 한성부의 으뜸 벼슬로 요즘으로 치면 서울시장이다.
  4. 〈수씨단인이씨묘지명〉에서.
  5. 서형수는 1806년 흥양현(고흥)에 유배된 뒤 추자도를 거쳐 임피현(군산)로 옮겨가, 1824년 76세에 임피현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9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서유구 또한 여기 연좌되어 벼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서유구는 임진강 북쪽 장연, 서울 주변 도봉산 아래, 남한강 유역 등지에서 은거하다가 서형수가 숨지고 나서야 복직할 수 있었다.
  6. 좌소산은 달성 서씨의 경제적 근거지가 있는 경기도 장단 백악산(白岳山)의 또 다른 이름이다.
  7. 원문은 다음과 같다. “余內子抄輯群書, 各分門目, 無非山居日用之要, 而尤詳於草木鳥獸之性味. 余爲 命其名曰閨閤叢書, 歷代叢書裒輯一家書, 謂之叢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