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체 빅데이터의 힘
박동석 농업연구관은 병원성 세균의 유전체 정보를 활용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그가 이끄는 연구의 핵심은 농산물이 자라고 이동하는 전 과정에서, 소비자의 안전을 지키는 데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농작물과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세균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진단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감염의 경로를 추적하는 연구도 함께 진행 중이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세균의 특성과 확산 양상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원인을 찾아내는 데 있다.
이러한 연구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과수화상병 진단 키트’ 개발이다. 2015년, 과수화상병이 급격히 확산되던 당시 농업 현장에서는 과수화상병과 가지검은마름병을 구별하기 어려워 신속하고 정확한 진단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박동석 농업연구관은 유전체 분석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누구나 현장에서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진단 키트를 개발해냈다.
“당시에도 진단 키트는 있었지만, 두 병을 정확히 구분하지는 못했어요. 게다가 진단 결과가 나오기까지 3박 4일, 길게는 일주일이나 걸렸죠. 병명을 확인하고 나면 이미 과수원 전체는 물론 인근 밭까지 병이 퍼진 뒤였어요. 과제는 세 가지 조건이었습니다. 두 병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하고, 진단 속도가 빨라야 하며,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진단 키트를 직접 개발했고, 6개월 만에 제품화에 성공했습니다.”
진단 키트 개발의 핵심은 방대한 ‘유전체 빅데이터’였다. 박동석 농업연구관은 미국 국립생물공학정보센터(NCBI, National Center for Biotechnology Information)에 축적된 공공 유전체 데이터를 활용했다. NCBI는 전 세계 생명과학자들이 연구 결과를 기탁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글로벌 유전체 정보 플랫폼이다. 특히 유전체에는 고유한 ‘식별번호’ 즉, 일종의 생체 주민등록번호가 부여되어 있어 연구자들은 이를 통해 병원체의 정보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박동석 농업연구관은 전 세계 연구자들이 수십 년간 축적해 온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특정 병원균을 빠르고 정확하게 식별할 수 있는 분석 알고리즘을 만들어냈고 그 기술이 진단 키트의 핵심이 됐다.
박동석 농업연구관은 이 모든 과정을 ‘디지털 원유 정제’에 비유한다. 유전체 빅데이터는 원유와 같아서, 가공되지 않은 상태로는 활용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여기에 알고리즘이라는 ‘정제 기술’을 적용하면, 휘발유나 제트유처럼 다양한 용도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팽이버섯 식중독 사고, 그리고 진단 기술의 확장
이 기술은 식물 병원균을 넘어, 인체에 해로운 식중독균 진단으로도 확장됐다. 2020년, 수출용 팽이버섯에서 리스테리아균이 검출되면서 미국 등 주요 수출국에서 통관이 거부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동석 농업연구관은 다시 한 번 진단 기술의 방향을 확장하게 된다. 그는 과수화상병 진단에 사용했던 유전체 기반 알고리즘을 응용해, 전례 없던 리스테리아균을 구분할 수 있는 새로운 진단법을 고안했다.
“저는 식물 병리학을 전공했는데, 인체 병원균을 다루게 되다 보니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같은 진단 키트라고 해도 적용 대상이나 방식이 달라서 처음에는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런데 문득 과수화상병에 썼던 진단법이 팽이버섯에도 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유전자를 찾아내고 검사하는 패턴 자체는 비슷하거든요.”
그는 과수화상병 진단에 사용했던 유전체 분석 알고리즘이 팽이버섯 진단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사비를 들여 마트에서 팽이버섯을 구입한 뒤 머리, 줄기, 밑동 등 부위별로 나누어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머리 뒷부분, 즉 갓 안쪽의 그늘진 부위에서 균이 가장 많이 검출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머리 부분을 잘라서 물에 담가놓기만 하면 세균이 스스로 나와요. 세균은 원래 물을 좋아하거든요. 마치 탈출하듯이 세포 안에서 물 쪽으로 빠져나오는데, 이때 ‘플라젤린’이라는 털 같은 구조를 이용해 헤엄치듯 움직여요.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방향도 감지하면서 물쪽으로 나오는 거예요. 덕분에 따로 DNA를 추출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렇게 물에서 추출한 소량(1마이크로리터)의 샘플만으로 유전자 검사를 수행하면, 기존에는 2~3일 걸리던 감염 여부 진단을 1시간 30분 이내에 확인할 수 있다. 민감도도 높아 마이크로리터당 30~100마리만 있어도 검출이 가능하다. 정확도는 90% 이하에서 100%까지 향상된다.
박동석 농업연구관이 개발한 이 기술은 네이처에서 발간하는 국제학술지 Scientific Reports(IF 3.8)에 게재되며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논문은 게재 후 6개월 만에 3,000건이 넘는 다운로드를 기록했고, 수출이 중단됐던 팽이버섯은 다시 해외 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현재 이 기술은 특허 출원을 마쳤으며, 전문 개발업체에 기술이전돼 올해 하반기에는 진단 도구(키트)로 상용화할 예정이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시·군 농업기술센터, 버섯 수출 농가, 일반 식품업체 등에서 활용할 수 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그 말이 마음에 꽂혔어요. 과학자로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었죠.
과학자로서 나의 길을 찾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박동석 농업연구관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 책이다. 무엇보다 과학자로서의 자아를 되묻게 하는 나침반이 됐다.
“처음엔 이 책이 너무 어렵고, 등장인물도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친구의 어머니를 향한 복잡한 감정, 종교적 상징 같은 것들이 말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그 말이 마음에 꽂혔어요. 과학자로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었죠.” 박동석 농업연구관은 연구원 초창기 시절을 ‘그저 남의 논리를 따라가는 흉내쟁이’였다고 회고한다.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연구원들 사이에서 학부 졸업자였던 그는, 처음에는 그저 그들의 연구를 ‘돕는’ 입장이었다.
“다른 연구자들의 결과를 검증하는 일에는 익숙했지만, 정작 저만의 논리나 철학은 없더라고요. 그게 좀 좌절감으로 다가왔어요. 그런데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죠. 제가 고등학교 때 전산반이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프로그래밍이라는 걸 접했어요. 그리고 2000년에 미생물 관련 프로젝트를 하나 맡게 됐어요.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던 시점이었는데,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던 상황에서 제게 그 기회가 온 거죠. 생명공학을 전공한 사람은 있어도, 그걸 디지털 영역까지 확장해 활용하는 사람은 없었거든요. 그렇게 프로젝트를 맡게 됐고, 저에게는 정말 큰 전환점이자 기회가 됐습니다.”
『데미안』에서 강조한 ‘진정한 자아를 찾아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은 과학자로서 본인에게 그대로 투영됐다. 그렇기에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과학의 철학은 명확하다.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스스로 탐구하고 의심하며 창조적인 발견을 해나가는 연구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그는 후배들에게도 늘 말한다. ‘남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너는 이미 죽은 과학자다.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걸 찾아라. 그리고 절대 안주하지 마라.’며.
이제 박동석 농업연구관의 정년이 1년 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작은 연구소를 만들어 인력을 양성하고 싶기도 하고, 연구 내용이 현장에서 쓰일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기도 하다. 정년이 머지않았다고 하지만, 박동석 농업연구관은 여전히 새로운 알을 깨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저 · 이순학 역 | 더스토리
1992년 공채로 농촌진흥청 농업유전공학연구소에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뛰어난 연구자들만 다룰 수 있는 최첨단 분야처럼 느껴져서, 저에게는 마치 커다란 벽처럼 다가왔죠. 과연 내가 이곳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약 10년의 시간을 보내게 됐습니다. 그 시절, 다시 꺼내 읽은 책이 데미안이었습니다.
데미안은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이며, 이를 통해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기존의 틀에 갇히지 않고, 기성 지식의 한계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탐구하며, 변화하고 성장해 나가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자아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많은 분들께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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