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을 전공해 가구 디자이너로 일하던 한 젊은 여성이 있었다. 바쁘게 달려온 도시 생활 속에서 그녀의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갔다. 밥보다 잠이 우선이던 날들, 삶의 균형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그때 그녀는 고향 전남 ‘영광’을 떠올렸다. 흙 냄새 가득한 밭, 따뜻한 밥상, 그리고 정겨운 마을 사람들. 그렇게 10년의 도시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그녀는 귀농을 결심했다. 하지만 부모님께 기대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곧장 내려가진 않았다. 대신 온라인몰을 열어 부모님이 재배한 보리와 잡곡을 판매하며 조금씩 자립의 기반을 다졌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 끝에 2016년, 이선화 이사는 마을기업 ‘지내들영농조합법인’과 함께 본격적인 귀농의 길에 올랐다. 지금, 그녀의 삶은 ‘북적북적’ 보리밭에서 다시 이어지고 있다.
도시에서 시골로, 보리밭에서 다시 서다
전남 영광은 이선화 이사의 부모님이 살아가는 땅이자, 그녀가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자라온 고향이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논과 밭, 이웃들과의 정겨운 일상은 몸과 마음이 지쳐 있을 때마다 늘 떠올리게 되는 원점 같은 공간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가구 디자이너로 10년 동안 분주하게 살아온 동안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고향의 의미가 점점 마음속에서 커졌다. 몸도 마음도 지쳐갈 즈음, 문득 고향이 그리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덜컥 내려올 수는 없었다. 이미 30대, 부모님께 기대고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선화 이사는 귀향에 앞서 온라인 판매라는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주말마다 고향에 내려가 보리쌀을 포장해서 택배를 보냈어요. 쿠팡이나 위메프, 티몬 같은 소셜커머스에도 입점해 보고요. 그냥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니까 조금씩 자리가 잡히더라고요. 그러면서 ‘아, 이 정도면 월급만큼은 벌 수 있겠다’ 싶은 확신이 생겼죠. 부모님께 부담은 드리지 않으면서도 혼자 설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겨나자, 그때 귀농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2016년, 그렇게 이선화 이사는 본격적으로 지내들영농조합법인에 합류했다. 지내들의 중심에는 언제나 ‘보리’가 있었다. 영광은 보리 특화 지역이었지만, 2012년 정부 수매가 중단되면서 농가들은 큰 판로를 잃었다. 지내들영농조합법인은 그 보리를 살리고 농민들의 생계를 지키기 위해 2013년에 태어난 공동체였다.
이선화 이사는 처음에는 농사보다 ‘판매 지원’에 힘을 쏟았다. 가구 디자이너였던 경험을 살려 선물세트 패키지를 새롭게 디자인하며, 농산물이 ‘어떻게 하면 더 잘 팔릴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렇게 쌓은 경험은 2017년 우체국 쇼핑 입점으로 이어졌고, 공공기관 납품과 사회적경제 공공구매 등 대량 판로가 열리면서 작은 규모였던 마을기업은 점차 성장세를 탔다. 하지만 그녀의 진짜 전환점은 같은 해, 청년농업인들과의 네트워킹에서 찾아왔다.
“그때만 해도 농촌에 내려오는 청년은 ‘실패해서 내려온다’는 편견이 있었거든요. 저는 스스로 선택해서 내려왔는데도 그런 시선을 받았어요. 그러다 보니 저 스스로도 ‘농부’라는 명함을 내밀지 못했죠. 그런데 청년농업인들과 교류하면서 관점이 확 달라졌어요. 한국농수산대학교 출신도 있고, 저처럼 귀농·귀촌한 청년도 있었는데, 다들 ‘농부’라는 명함을 당당하게 내밀더라고요. 자기 생활을 적극적으로 꾸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보리를 들고 시장으로 나가다
이선화 이사의 발걸음은 점차 빨라지고, 넓어지기 시작했다.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으로까지 무대를 넓히며 메가마트와 백화점 팝업, 전국을 누비는 보부상 마켓까지 활동 반경이 커졌다. 함께한 청년농부들과는 ‘우리 청춘을 다 팔았다’는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하루에도 수백만 원 매출을 올리며 전국 곳곳을 누볐다.
“메가마트 팝업은 정말 뚝심으로 들어갔어요. 직접 MD를 찾아가 ‘전남 청년농부인데요, 이런 제품이 있습니다. 팝업 한 번만 해주세요’라고 부탁했죠. 다행히 좋게 봐주셔서 1년 동안 팝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판매할 때는 잠시도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바빴지만, 말 그대로 ‘청춘을 다 팔았다’고 할 만큼 정말 열심히 뛰었어요.”
그 노력은 곧 보리의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각종 팝업과 박람회 무대를 통해 ‘영광 보리’라는 이름이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고, 현장에서 만난 소비자들의 반응은 판로를 넓혀갈 자신감을 더해 줬다.
그렇게 보리의 가치를 전해가던 중, 예기치 못한 위기가 찾아왔다. 농가에서 계약재배로 키운 보리가 코로나19로 인해 급식과 식품 가공업체 납품이 막히면서 계약이 줄줄이 취소된 것이다. 결국 보리는 창고에 그대로 쌓여버렸고, 이선화 이사는 ‘그냥 둘 수는 없다’는 절박함 속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 무렵 주부들 얘기를 들어보니 고민이 있더라고요. 아이들이 집에만 있으니까 간식을 계속 챙겨줘야 하는데, 건강하고 간편한 게 마땅치 않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보리로 가공품을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보리떡볶이, 찰보리치즈핫도그, 보리미숫가루, 보리차 같은 제품을 개발해 판매를 시작했죠. 아이들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고, 어른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제품이라 반응이 꽤 좋았습니다.”
하지만 아이스박스 등 냉동 포장재 쓰레기 문제가 커지면서 국수와 떡볶이는 단종됐고, 현재는 핫도그만 유지하고 있다. 이후에는 밀키트에도 도전했으며, 최근에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제품이 탄생했다. 바로 영광 현미와 보리로 만든 ‘샌드칩’이다. 국립식량과학원에서 제공받은 ‘흑누리’ 품종을 현미와 함께 활용해 초콜릿 샌드 형태로 만든 이 간식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제품으로 자리 잡았다. 2024년 12월 출시 이후 2025년 한 해에만 6차 발주가 이어질 만큼 큰 반응을 얻으며, 보리 가공품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실히 증명해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샌드칩은 인근 해남·고창 등 다른 마을기업과 협업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농촌의 작은 기업들과 연구하고 상생하며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이다.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이나 마을기업이랑 같이 상생하는 방식을 택했어요. 그러다 보니, 서로 윈윈하는 구조에 가까웠습니다. 공장 쪽은 운영난이 있었고, 저희는 생산 인프라가 필요했으니까 서로 딱 필요가 맞았던 거죠. 그래서 좋은 상품들을 함께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시도들을 마음껏 담아낼 수 있는 공간, 그게 바로 할매곳간이에요. 여기서는 상품 개발과 브랜딩을 더 자유롭게 펼치고, 동시에 어르신들 일자리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내일을 위한 새로운 도전
이제는 당당히 자신을 ‘농부’라 말할 수 있는 이선화 이사는 한 발 더 나아가, ‘여성 농업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내는 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청년여성농업인 협동조합 ‘청연홍’ 활동을 통해 여성의 안전과 생활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것도, 더 많은 여성 농업인들이 농촌에 안심하고 또 더욱 힘있게 뿌리내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녀가 강조하는 변화는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꼭 필요한 기본 안전망, 바로 여성들이 농촌에서 안심하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로 한 최소한의 장치들이다. ‘CCTV와 가로등 같은 기본적인 안전 시설이 필요하다’는 그의 목소리는, 단순한 개인의 바람이 아니라 여성 농업인 전체의 현실을 대변하는 울림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또 다른 이름, ‘할매곳간’으로 새로운 길을 준비하고 있다. 지내들영농조합을 운영하며 언제나 공동체라는 울타리를 먼저 생각했다. 함께하는 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다 보니, 자신의 아이디어와 실험을 마음껏 펼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더 자유롭게, 직접 구상한 가공품을 마음껏 시도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무엇보다 어르신들 일자리를 만드는 데 관심이 많아요. 보리 가공은 고도의 기술보다는 작은 수작업이 많거든요. 그래서 고령층이나 취약계층과도 충분히 함께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이런 생각으로 2021년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을 통해 할매곳간이라는 브랜드를 시작했죠. 제가 하고 싶은 시도들을 마음껏 담아낼 수 있는 공간, 그게 바로 할매곳간이에요. 여기서는 상품 개발과 브랜딩을 더 자유롭게 펼치고, 동시에 어르신들 일자리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도시에서 밥보다 잠을 좇던 날들에서, 이제는 보리로 마을과 세대를 잇는 길 위에 서 있는 이선화 이사. 그녀의 삶은 농촌이 결코 실패의 무대가 아님을, 오히려 스스로의 가능성을 당당히 펼칠 수 있는 또 하나의 무대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우리가 매일 먹는 한 끼 속에 스며들어, 작고 단단한 보리 알곡으로 우리와 만나고 있다.
지내들영농조합법인의 대표 상품
맛있으면서도 건강한 선택!
영광 검정보리샌드
한입 베어 물면 바삭함 속에 고소한 현미와 검정보리의 풍미, 그리고 달콤한 초코 필링이 어우러져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① 영광 검정보리
2011년 국립식량과학원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한 품종으로, 안토시아닌 함량이 일반 보리의 약 4배에 달하고, 쌀에는 없는 베타글루칸까지 함유하고 있어 건강과 영양을 한 번에 챙길 수 있습니다.
② 영광 현미
영양 가득한 간척지 땅에서 해풍을 맞으며 자란 건강한 현미로, 지내들 농부들이 직접 정성껏 재배하였습니다.미네랄이 풍부해 영양까지 함께 챙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