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
흔하다는 이유로 저평가되는 식재료가 있다. 대표적으로 쌀이 그렇다. 도정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도 적지 않다. 박보람 농업연구사는 이런 ‘흔한 것’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며 기능성 식품 소재로 바꾸는 연구를 이어왔다. 그의 연구는 소화가 잘 되지 않는 전분을 개발하거나, 식이섬유가 장내 미생물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밝히는 일까지, 농식품의 기본을 새롭게 정의하는 과정이었다.
“쌀의 약 85%는 전분입니다. 그래서 밥을 먹으면 혈당이 빨리 오른다고들 하잖아요. 하지만 전분의 구조를 바꿔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열 처리나 효소 처리를 거쳐 전분을 ‘소화가 잘 안 되는 구조’로 만들면 혈당 상승을 완화할 수 있어요. 난소화성 말토덱스트린 같은 성분이 대표적인데, 이미 식이섬유 강화 사이다나 저당 즉석밥 같은 제품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저도 쌀 전분 구조를 더 효과적으로 바꿀 수 있는 효소를 개발했어요.”
박보람 농업연구사는 쌀 전분을 효소로 가공해 ‘저항전분’이나 ‘기능성 당류’로 바꾸는 연구를 하고 있다. 특히 미생물에서 얻은 특별한 효소를 활용해 전분 구조를 변형시키는 방식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분은 혈당 조절이나 장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어, 차세대 기능성 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기술을 개발한 뒤 산업화로 이어가는 과정은 멀고도 험하다. 인허가와 안정성 평가에는 수년의 시간과 수억 원의 비용이 들고, 새로운 기술이 기존 공정과 맞지 않으면 상업화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박보람 농업연구사는 이 벽을 넘기 위해 지금도 기업과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전까지는 연구자로서 소재 기술을 개발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상업화 단계로 들어가면 연구자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높은 장벽이 있어요. 제품으로 이어지려면 노하우와 자본을 보유한 기업에서 평가와 인허가를 진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걸 직접 해내기보다, 쌀에서 기능성 당류를 만드는 핵심 효소 기반 소재 기술을 개발하고 기업과 협력해 후속 단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원료의 효능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각 소재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일이죠.”
부산물에서 발견한 새로운 가치
그의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식품 속 식이섬유가 실제 대사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밝히려면, 장내 미생물과의 상호작용까지 추적해야 했다. 이 도전은 장내 미생물을 직접 관찰하고 대사 과정을 추적하는 연구로까지 그를 이끌었다.
“예전에는 식품 원료의 기능성을 평가하는 방식이 대동소이 했습니다. 예를 들어 과일이나 채소 중 물에 녹아나오는 성분만을 착즙(추출), 농축해 건조된 분말의 효능을 분석하는 접근이었죠. 그 과정에서 껍질이나 찌꺼기 같은 부산물은 늘 버려졌고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식이섬유 중 대부분은 물에 녹거나, 소화되지 않고 대장까지 내려가 미생물이 분해해야만 우리 몸에서 작용합니다. 그러니 세포 실험만으로는 바로 효과를 확인하기 어렵고, 반드시 ‘장내 미생물’이라는 경로를 거쳐야 이해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저는 부산물에 풍부한 식이섬유의 효능을 평가하기 위해 대변의 장내 미생물을 이용해 원료 또는 소재의 장 건강 효능(장내 마이크로바이옴 영향)을 추척 평가하는 파이프라인을 구축했습니다. 지금은 여러 종류의 식이섬유가 장에서 어떤 세균을 늘리고, 또 미생물 다양성을 얼마나 유지하게 하는지를 수치로 보여줄 수 있게 됐습니다.”
연구가 진척될수록 흔히 너무 풍부해서 무가치하게 여겨졌던 쌀(탄수화물)이나 부산물의 의미가 새롭게 보였다. 쌀에는 미생물 기술이 더해져 기능성(난소화성) 탄수화물로 탈바꿈 했고, 쌀겨, 커피박, 콩비지, 맥주효모 같은 부산물은 그의 연구실 안에서 다시 쓰임을 얻었다. 다양한 구조의 식이섬유는 대장에서 장내 미생물의 주요 먹이로 이용되어 장 건강에 이로운 짧은사슬지방산을 만들어내고, 유익균이 잘 자라도록 도와 장내 미생물 균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는 사실도 여러 측정 결과로 확인됐다.
그는 이 과정에서 그냥 버려졌던 부산물이 사실은 식이섬유와 기능성 탄수화물의 보고(寶庫)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단순히 ‘좋다’는 식의 모호한 설명 대신, 구체적인 지표와 수치를 통해 효능을 제시하는 길을 찾고 있다.
“농식품이 우리 몸에 ‘어떻게 좋은지’를 알리고 싶습니다. 섬유질만 해도 수용성과 불용성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사과를 예로 들면 과육에는 수용성 섬유가 많아 비피도박테리아 균 증식을 돕습니다. 반면 껍질에는 질긴 섬유소가 풍부해 대장 내 루미노코쿠스 균 같은 유익균 증식 효과가 있어요. 이는 단순한 영양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미생물을 어떻게 길러내느냐와 연결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장내 세균 구성 차이가 개인별 혈당반응이나 배변 습관 같은 일상적 건강 지표와 큰 연관이 있다는 대규모 연구결과도 Cell과 같은 유명 저널에 보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다양성과 균형입니다. 저는 이런 구체적이고 과학적으로 입증된 결과를 통해 소비자에게 우리 농산물의 우수성을 알리는 연구를 계속해서 해보고 싶습니다.”
흔해서 버려졌던 것들에 다시 이름을 붙이고 기능을 찾아주는 것, 그것이 앞으로도 제가 연구자로서 하고 싶은 일입니다
다시 본질로 향하는 질문들
연구자로 20대를 보낸 그는 어느새 시선을 ‘개발’에서 ‘재발견’ 으로 확장했다. 인간과 휴머노이드가 공존하는 미래 사회를 그린 소설 『작별인사』 속 구절, ‘자기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 그게 성장’이라는 말처럼, 그는 자신의 세계가 부정될 때 오히려 더 큰 가능성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새로운 소재를 직접 만드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식이섬유를 비롯한 소재의 소화·발효 평가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면서 보니까, 자연에 널린 부산물 그 자체가 무궁무진한 자원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제가 열심히 만든 소재보다 자연 그대로의 식이섬유가 훨씬 뛰어난 경우도 있었습니다. 내가 전부인 줄 알았던 세계가 부정되는 순간, 오히려 더 넓은 가능성이 열리더라고요.”
종착점은 결국 하나다. 더 이상 흔한 것들이 버려지지 않도록 ‘쓸모’를 새롭게 발굴하는 일. 박보람 농업연구사는 앞으로도 탄수화물이라는 주제를 계속 파고들며, 그 안에서 건강과 환경, 지속가능성을 연결하고 싶다고 말한다.
“옛날에는 기술을 적용한 제품이 마트에 진열된 걸 보는 게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많이 생산돼 쉽게 버려지던 것들에 제 기능을 찾아주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부산물은 쓰레기가 아니라 자원입니다. 흔해서 버려졌던 것들에 다시 이름을 붙이고 기능을 찾아주는 것, 그것이 앞으로도 제가 연구자로서 하고 싶은 일입니다.”
박보람 농업연구사의 관심은 단순히 소재를 거듭 변형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미 자연 속에 존재하는 가치를 발굴하고 증명함으로써, 이미 훌륭하게 존재하는 자연의 선물을 고르게 섭취하고 덜 버리게 되는 것. 버려진 부산물에서 새로운 쓰임을 찾아내 결국 가치를 부여하는 것.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을 박보람 농업연구사가 묵묵히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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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저자(글) | 문학동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영생을 사는 휴머노이드의 모습이었어요. 그들에게는 죽음이 없어 나쁜 점이 많은 것 같았어요. 영화를 봐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걸 보면,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만이 문화를 향유하고 예술을 사랑할 수 있더라고요.
결말도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주인공들은 서로 다른 생명 형태를 지녔지만,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생에 대한 의미를 부여해요. 때로는 자기 존재를 부정하기도 하지만 결국 성장하는 모습은, 인간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소설 속 배경은 극도로 과학이 발달한 미래 세계, 혐오와 차별로 만연한 암울한 사회입니다. 하지만 그 어둠을 넘어서는 순간 결국 서로에게 건네는 따뜻한 인사가 남아있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해가는 현대 사회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서로를 돌아보고 의지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일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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