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 탐구

조리와 음식을 열쇠말로 기록한 유산

수운잡방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

자료: 국가유산청

지난 9월 16일 <수운잡방(需雲雜方)>과 <음식디미방> 두 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 태평양 지역 목록 등재 한국 후보로 선정되었다. <수운잡방>과 <음식디미방>은 각각 책이 쓰일 때의 조리법과 음식 그리고 여기 잇닿은 다채로운 어휘와 표현을 담고 있다. 더구나 두 책은 저마다 16세기와 17세기 한식의 한 면모를 입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에 이번 호에서는 <수운잡방>을, 다음 호에서는 <음식디미방>을 살펴보겠다.

<수운잡방>은 안동에 사는 광산 김씨(光山金氏) 김유(金綏, 1491~1555)1)가 썼다. 그의 손자인 김령(金坽, 1577~1641)이 뒤이어 정리하고 보충했으며, 김유의 셋째 아들 김부륜(金富倫, 1531~1598)의 종가에 전해오다 1986년 세상에 알려졌다. 그 제목부터 살펴보자. ‘수운(需雲)’은 <주역(周易)>의 ‘구름(雲)이 하늘에 오른 것이 수(需)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마시고 먹으며 잔치하고 즐긴다(雲上于天需, 君子以飮食宴樂)’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수(需)’에는 ‘기다리다’의 뜻도 있다. 구름 끼었다고 바로 비가 내리지도 않는다. 곧 사물에는 때가 있으니, 음식으로 몸과 마음을 기르며 사물의 제 때를 기다린다는 비유가 될 만하다. 이 말은 ‘격조 있는 음식 및 연회’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곤 했다. ‘잡방(雜方)’은 갖가지 방법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수운잡방’을 곧 ‘격조 있는 음식으로 군자를 대접하는 갖가지 방법’으로 새길 수 있는 것이다.2)

김유는 무엇을 기다리며 음식과 차림을 들여다보고 또 기록했을까. 그의 형 김연(金緣, 1487~1544)은 과거의 모든 단계를 제대로 밟은 뒤,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떳떳하게, 제대로 양반다운 명예를 이룬 사람이었다. 반면 김유는 생원시 합격을 끝으로 더 이상 응시하지 않았다. 무과마저 잘 안 되자 포기했다. 그런데 김유는 자신의 아들 삼형제 김부인(金富仁), 김부신(金富信), 김부륜(金富倫)를 대학자 이황(李滉, 1502~1571)의 문하에 들여보냈다. 그의 맏며느리는 퇴계 못잖은 인물인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딸이다. 자신의 딸은 이황의 조카와 혼인시켰다. 생원에 그쳤지만 김유는 원래 넉넉한 집안 출신인 데다 양아버지 김만균(金萬鈞)의 재산까지 상속받아 더욱 부유해졌다.3) 집안 전체를 놓고 보면 형님이 중앙에서 활동하느라 고향을 비우고 있는 사이, 집안을 지키는 역할 분담이 딱 맞아떨어진다. 이때 토지와 산림의 경영은 미래를 준비하는 양반의 기본이다. 갈무리한 식료품, 법수를 지킨 조리법과 음식과 차림은 그 경영의 수준을 드러내는 척도이다. 더구나 고향을 지키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일상생활에서나 특별한 행사에서나 격조 높은 손님맞이가 필수다. 제사에서는 양반다운 격식을 더욱 잘 지켜야 한다. 김유는 친부모와 양부모 제사를 이어 나가야 했다. 김유는 음식을 통해 실제로 오늘을 경영하고, 다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았다. 거기서 우러난 일상생활의 한 면이 <수운잡방>에 가 맺혔다. 저 ‘수운’이 그저 말뿐만이 아니었다.

“출세에는 비록 뜻을 접었지만 향리에서 스스로 자족하는 삶을 살았지. 좋은 땅 오천4)에 밭과 집을 두고, 주방에는 맛있는 음식이 즐비하며 항아리에는 향기로운 술이 넘쳤네. 그것으로 조상을 섬기고 부모를 봉양하며, 잔치를 즐기었네. 생전에 큰 기쁨이란 자리에 반갑고 귀한 손님들이 모여드는 것.”5)

이황은 김유를 추모하며 위와 같은 한 구절을 남겼다. 실로 수운과 잡방을 아우른 삶이었다.

분류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지만 김귀영의 연구에 따르면, 이 책은 김유가 쓴 상편에 86항, 손자 김령 때까지 보충된 하편에 36항까지 모두 122항을 담고 있다. 이 가운데 술 항목이 절반이다. 그 나머지는 식초, 절임 및 침채(넓은 뜻의 김치), 장, 과자, 기타 반찬, 탕, 두부, 타락(駝酪, 우유), 면, 채소와 과일 파종 및 저장법에 할애하고 있다. 이처럼 술의 비중이 큰 이유가 있다. 격식 있는 접빈객(接賓客)의 자리를 위해서라면 다른 무엇보다 술에 먼저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양반이 양반다움을 드러내는 의례인 봉제사(奉祭祀)에서도 그렇다. 의례의 핵심에 술이 있고, 의례를 위해 모인 사람들의 단합을 확인할 때 에도 그렇다. 김유가 남긴 술의 주재료는 찹쌀, 멥쌀, 밀가루를 아우른다. 그 기본 제법, 그 제법의 모식도가 한문으로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술 빚는 분들께도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이다.

여기에 관능 묘사가 함께다. “빛깔이 맑고 맛이 독하다[色淸味猛]” “향기로우면서 달다(有香而甘)” “맑고 투명하기가 술독 바닥이 보일 정도이고 빛깔은 가을날의 이슬 같다(澄淸到底, 色如秋露)” 등등의 표현을 보고 있노라면, 그 네 글자 한 구의 묘를 오늘날 술 빚는 분들이 광고홍보와 디자인에도 적용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난다. 이런 표현은 김유 시대의 오이지인 수과저(水瓜菹) 항목에서도 다시 볼 수 있다. 수과저를, <수운잡방>의 설명에 따라 잘 담그면 “국물이 바닥까지 보일 정도로 투과율이 좋아 맑기가 수정 같다(菹水到底淸如水晶)”라고 했다. 유학을 익힌 남성의 한문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한자로 당시의 조선어를 남기기도 했다. ‘모난이법(毛難伊法)’은 도대체 무엇일까? 생가지를 사등분해 양쪽 끝을 네모지게 재단해 만드는 조리법이다. ‘기화장(其火醬)’은 또 무엇일까? 중세 한국어 공부한 사람들은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기화’는 ‘기블’을 한자식으로 쓴 것이다. ‘기블’은 ‘기울’을 뜻하니, 기화장이란 곧 겨장이다. ‘토읍침채(土邑沈菜)’는? 동치미이다. 도저히 한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휘라면, 안 쓰고 만 게 아니라, 김유는 이런 식으로 방법을 찾았다. <수운잡방>의 동치미는 음력 정월과 이월 사이에, 오로지 참무와 물과 소금만 써 담근다. 그러고 보니 고추, 고춧가루가 없던 시대의 기록이다. ‘총침채(蔥沈菜)’ 곧 파김치의 모습은 어땠을까? 여기서도 오로지 파와 소금과 물만 써 절여 숙성시켰다. 익으면 껍질과 뿌리를 떼고 흰 부분을 주로 먹었다. 또는 홍당무를 소금에 절이는 모습도 재미나다. 홍당 무는 ‘당나복(唐籮蔔)’으로 썼다. 기록한 어느 음식이나 글로만으로도 그 모습이 상상된다. 덜 장황하기에 도리어 조리의 모식도가 단박에 떠오르도록 썼다. 조선 전기 한 양반 남성이 이만한 기록을 남겼다. 미래의 독자까지 기다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시대가 이렇게 <수운잡방>의 새 독자를 낳고 있다. 그것도 이렇게 적극적인 독자를.

  1. 호는 ‘탁청정(濯淸亭)’이다. 오늘날 안동시 와룡면 군자리에 전해 오는 광산 김씨 탁정정공파 종택에 딸린 정자인 탁청정 또한 김유가 1514년에 지은 것이다.
  2. 이숙인, <유선들의 풍류와 소통—<수운잡방>을 통해 본 16세기 한 사족의 문화정치학>, <<대동문화연구>>, 제80호.
  3. 김유는 1491년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5촌 고모 김씨와 고모부 김만균에게 입양되었다. 손계영, <1516년 김유 분재기 및 허여사급입안의 문서 생산 절차와 배경>, <<영남학>>, 제22호, 2012.
  4. 오늘날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군자리길 일대.
  5. “於世雖屈, 於身自足. 勝地烏川, 有田有宅. 庖繼兼珍, 甕溢香醁. 以祠以養, 以燕以樂. 生前大歡, 座上嘉客.” <성균관생원김공묘지명병서(成均生員金公墓誌銘幷序)>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