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디미방>은 지난 호에 소개한 <수운잡방>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 목록 등재 한국 후보에 오른 조선의 조리서이다. 책을 열면,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앞표지의 뒷면에 위와 같은 시구가 보인다. ‘그래, 꽤 오래 여성 곧 주부이고 주부 곧 여성이었지. 새색시에게 세상이 바라던 바가 있었지’ 하며 살짝 웃음이 난다. 지난 시대가 새삼스레 다가온다. 지난 호에 쓴 대로 <수운잡방>은 조선 전기 경북 양반 남성이 한문으로 써 남긴 기록이다. 이에 견주어 <음식디미방>은 조선 후기 경북 양반 여성이 한글로 써 남긴 기록이다. 살림을 알뜰살뜰 꾸려가는 집안이라면, 가장은 가장대로 조리와 음식을 내 일로 여겼고 주부는 주부대로 조리와 음식을 내 일로 여겼음을 되새긴다.
이 책을 쓰고 남긴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은 임진왜란이 끝나가던 1598년 11월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춘파마을에서 아버지 장흥효(張興孝, 1564~1633)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장흥효는 대학자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제자인 데다 명망이 높아 집에는 제자와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 덕분이었을 테다. 장계향은 일찌감치 한문을 익혔고, 시문을 지었고, 글씨를 잘 썼다.1) <음식디미방>에 보이는 어휘와 문장과 짜임새가 그 재주와 교양의 증거이다. 친정에서 평온하게 살던 장계향은 1616년 열아홉 나이에 출가한다. 첫 부인과 사별한 재령 이씨 이시명(李時明, 1590~1674)과 혼인한 것이다. 장계향은 친정을 떠나 시집이 있는 영해(寧海)2)로 가 살다, 1631년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두들마을로 분가해 나간다. 그 뒤 두들마을과 시댁이 있는 영해를 오가며 살다, 1640년 이시명이 두들마을에 집을 짓는3) 한편 석계초당(石溪草堂)을 세워 후학 양성에 힘쓰면서 제2의 두들마을살이를 시작한다. 1953년에는 두메산골인 영양의 수비(首比)4)로 한 번 더 삶의 터전을 옮겼고, 1672년 다시 안동군 풍산읍 수곡리로 이사한다. 1674년 이시명이 수곡리에서 세상을 뜨자 장계향은 큰아들 이상일(李尙逸)5)이 살고 있던 영해를 거쳐 다시 두들마을로 돌아왔다가, 1680년 생애를 마감하였다.
장계향은 점잖은 집안 출신으로 곤궁할 것 없는 집안으로 출가했다. 하지만 장계향의 시대는 광해군과 인조에 걸친 혼란기였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시대였고, 명청교체의 격변기이기도 했다. 굳이 살펴본 이사는 부부가 집안을 지키고, 집안을 다음 대에 이어가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예컨대 부부는 두들마을로 살림을 날 때 구황을 염두에 두고 참나무를 어마어마하게 심었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도토리가 잔뜩 난다. 이때의 실제 경영과 재산 관리는 장계향의 몫이었던 듯하다. 양반다운 체면을 차리기 위한 가정경영 일체가 장계향에게 또 다른 의무이자 부담이었으리라. 여기다 음식은 그저그런 집안일이 아니었다. 가문의 품격과 의례의 상징이었다. 더구나 장계향은 큰 고을 영해의 종가(宗家)6)로 시집간 처지였다. 제사와 손님맞이, 문중 간의 교류 등 모든 행사의 중심에 종가가 있다. 종가의 살림을 맡은 여성에게, 격식을 갖춘 정갈한 음식과 정성을 다한 장이며 술은 가문의 명예와 직결되었다. 음식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완성도는 맛과 차림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장계향은 음식에 잇닿은 내 경험과 가풍을 후손에게 전하고 싶었을 테다. <음식디미방> 집필의 동력을 이렇게 짐작해 본다.
이 책의 표지에 쓰인 제목은 한자로 쓴 ‘閨壼是議方(규곤시의방)’이다. 그러나 본문 첫 머리에는 그 제목이 순한글로 ‘음식디미방’이라 적혀 있다. 한 책에 두 제목이라니 어찌 된 노릇일까? 뜻부터 풀어보자. ‘규곤(閨壼)’은 여성 공간인 ‘안방’과 ‘안뜰’을 뜻한다. ‘시의방(是議方)’은 ‘올바른 방문’이라는 뜻이다. ‘음식디미방’은 한자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언어학에 힘입어 ‘飮食知味方(음식디미방)’으로 새길 수 있다. ‘지(知)’의 고음이 ‘디’이다. 곧 ‘좋은 음식 맛을 내는 방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7) 연구자들은 지금 경북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책의 표지와 장정은 후손이 마련한 것이고, ‘규곤시의방’이라는 제목도 격식을 갖추기 위해 한문 감각을 따라 나중에 붙인 것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지금 전해오는 책의 본문이 시작하는 면에서, 본문 시작과 함께 보이는 제목은 ‘음식디미방’이다. 그러니 장계향이 붙인 제목은 ‘음식디미방’이 아닐까 짐작한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이 책의 제 이름은 ‘음식디미방’으로 잡고, 별칭으로 ‘규곤시의방’을 부기한다.
이 책에는 모두 146가지 조리법 및 음식이 실려 있다. 쓰인 대로 따라가면 크게 세 부류가 된다. 곧 면병류(麵餠類, 국수 및 떡 종류) 18항목, 어육류(魚肉類, 생선 및 고기 재료 음식) 74항목, 주국방문(酒麴方文, 술 및 초 종류) 54항목 등이다. 다만 어육류에 여러 가지 다른 음식 30항목이 섞여 있고, 주국방문에서 식초에 관한 3항목에 그친다. 필사 과정에서 또는 책을 묶는 과정에서 혼란이 있었던 듯하다. 아무려나 펼쳐보면 볼수록 당시 안동, 영해, 영양 지역의 밥상이 얼마나 다채로웠는지 잘 드러난다. 또는 고려 말부터 전해 내려오는 ‘상화(霜花)’의 조리법도 실려 있다. 상화는 발효 반죽에 의한 떡으로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의 그 ‘쌍화’이다. <쌍화점>은 이렇게 노래한다. ‘쌍화 사러 갔는데 회회아비[回回아비, 이방인 점주]가 내 손목을 쥐더라.’ 곧 서역에서 들어온, 밀가루 반죽을 부풀려 폭신한 질감의 떡 또는 만두피를 만드는 기술이다. 여기다 다양한 양조법, 국수와 만두 조리법, 떡 및 과자 조리법, 고추 재배가 확산되기 이전 초피와 겨자 등으로 향과 맛을 내는 방식, 온갖 반찬 조리법, 채소 저장법 등이 섬세한 표현과 멋진 문장으로 구현되어 있다. 요컨대 이 책은 행간까지 깊이 읽어낸다면 ‘17세기 조선의 미식 문화 사전’으로 다시 읽을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요리사들에게도 상상력의 원천이 될 만하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연재분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장계향의 셋째 아들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은 어머니의 삶을 정리한 글 <선비증정부인장씨행실기(先妣贈貞夫 人張氏行實記)>를 남겼다. 이를 통해 장계향의 공부와 교양의 세목을 확인할 수 있다. 위 글에 따르면 장계향은 당시로서는 자신의 재주를 쓸 곳이 없음을 또한 일찌감치 깨달았다
- 정확히는 오늘날의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인량마을(별칭 ‘나랏골’)이다. 조선 시대에는 영해가 영덕보다 훨씬 큰 고을이었다.
- 이 집이 경북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길 77(원리리)에 자리한 석계고택(石溪古宅)이다. 여기서 부부가 실제로 오래 살았다. 장계향은 여기서 늘그막을 보냈고, <음식디미방>을 썼고, 임종을 맞았다.
- 오늘날의 경북 영양군 영양읍 수비면.
- 이상일의 생모는 광산 김씨이다. 이시명은 광산 김씨 사이에서 1남 1녀를, 장계향과는 6남 2녀를 두었다. 장계향은 7남 3녀를 모두 잘 키웠다. 남매 모두 서로 화목하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 원래는 적장자로만 이어져 집안의 부계의 정통성을 쥔 큰집을 일컫는다. 그 가운데서도 국가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추앙받을 때 종가로 인식된다. 종가에는 종가다운 전승과 의례가 있다.
- 백두현, <음식디미방[閨壼是議方]의 내용과 구성에 대한 연구>, <<영남학>>(창간호)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