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과 기억을 품은 바다
지팡이에 의지해 바다로 향하는 96세 현순직 대상군(해녀 계급 중 가장 높은 계급) 해녀의 걸음은 비록 느리지만,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만큼은 여전히 인어처럼 가볍다. 그녀는 “막 헤엄쳐서 가야 해”라고 웃으며 지난 여정을 회고한다. 독도에서 3년을 물질하며 보냈던 시간, 숨을 견디다 정신을 잃은 이모를 끌어올렸던 순간, 이어도를 노래하며 고통을 잊으려 했던 해녀들의 숨비소리까지. 그의 기억은 바다의 결처럼 깊게 이어진다. 영화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한 세대가 살아낸 삶을 고스란히 펼쳐 보이는 아카이브가 된다.
무엇보다 현순직 해녀가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물살을 읽고, 바위 지형을 외우고, 숨을 길게 붙들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 ‘들물여’. 해녀만 알고, 해녀만 건널 수 있는 그 비밀스러운 바닷속 풍경에는 한때 붉고 푸르스름한 물꽃이 나무처럼 피어올랐다. 물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그 자리에는 전복과 소라 같은 해산물도 끝없이 넘쳐났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 속 바다는 더 이상 그 시절의 바다가 아니다. 물꽃이 시들고, 소라도 감태도 보이지 않는 빈 자리들만 남아 있다. 현순직 해녀는 바다가 아픈 것 같아 자꾸만 자신의 탓을 한다. “바다가 부모라. 부모도 바다만큼 주지 못해.” 그 말은 한평생 바다에 빚지고 산 사람의 죄책감이자, 그럼에도 끝내 바다를 미워할 수 없는 고백이다. 그리고 그 삶들은 모두 바다에서 숨을 빌려 살아온 사람들이다.
사라지는 바다에서 이어지는 숨
영화는 또 다른 해녀, 30대의 채지애 씨를 따라간다. 그는 해녀인 어머니의 뒷바라지 속에 육지에서 대학을 마치고 헤어디자이너로 일했다. 하지만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바닷소리처럼 들릴 만큼 향수병이 깊어지자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고,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해녀의 길을 택했다. 처음 바다에 들어선 날, 깊이를 가늠하지 못해 테왁에 매달려 덜컥거리며 첫 인사를 나눴고, 물멀미에 헤롱거리며 돌아온 날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눈만 감으면 소라가 보이는 중독성’이 그녀를 다시 바다로 이끌었다.
현순직 해녀는 그런 채지애 씨를 유독 아낀다. “저 아이가 제일 마음씨가 곱다.”며 그는 자신의 노하우를 자연스레 전하며 그녀를 이끌고, 마침내 두 사람은 전설처럼 회자되던 들물여의 물꽃을 찾아 나선다. 평생 그 풍경을 가슴에 품어왔던 현순직 해녀에게는 그리움의 자리로 향하는 길이고, 채지애 씨에게는 어릴 적부터 들어온 전설의 실제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감정이 가장 깊게 고조되는 정점이 된다.
하지만 그곳엔 기억과 다른 바다가 있다. 빛이 사라지고, 꽃이 시들고, 생명이 떠난 자리. 현순직 해녀는 말없이 물 위에 앉아 달빛을 바라본다. 그 장면은 마치 바다와 작별을 말하지 못해 망설이는 사람의 뒷모습 같았다. 바다는 그녀의 집이었고, 생계였고, 젊음이었고, 그리움이었고, 애증이었다. 그리고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내어준 바다였다.
‘물꽃의 전설’은 무엇보다 제주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끝까지 붙잡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해녀도, 제주어도, 바다도. 이제는 옛 모습을 잃어가며 조금씩 사라져가는 제주 고유의 풍경들이다. 영화는 그 풍경을 지키려는 이들의 숨을 조용히 비춘다. 그리고 마음 한쪽에 이런 문장을 남긴다. “숨을 참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를 지키는 숨 또한 얼마나 소중한가.”
그 숨이 이어지는 곳, 삼달리. 지금 우리가 걷게 될 이 마을과 바다는, 영화 속 그들의 삶이 깃든 장소다. 바다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여운을 품고, 이제는 삼달리 주변의 풍경들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가 보자.
파도 위에서 태어난 산의 전설
성산일출봉
영화의 주 무대인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에는 오래된 시간의 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곳이 성산일출봉이다.
제주도의 일반적인 오름과 달리, 성산일출봉은 바다 속에서 마그마가 분출하며 만들어진 독특한 수성 화산체다. 뜨거운 마그마가 차가운 바닷물을 만나는 순간 수증기가 치솟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화산재가 촉촉하고 끈끈한 성질을 띠며 층층이 쌓여 지금의 웅장한 형태가 되었다. 탐방로는 무료 구간과 유료 구간으로 나뉜다. 유료 탐방로는 정상까지 오르는 길로, 웅대한 분화구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다. 무료 탐방로는 성산일출봉 아래의 바다와 주변 풍경을 가볍게 산책하기 좋다. 오르막이 거의 없어 누구나 편하게 걸음걸음을 즐길 수 있다.
정상에 서면 너비 약 8만 평의 커다란 분화구가 그릇처럼 오목하게 펼쳐지고, 안쪽에는 억새가 바람을 따라 일렁인다. 분화구 둘레에는 99개의 작은 봉우리들이 옹기종기 둘러서 있는데, 이 모습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성곽 같아 ‘성산(城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에 일출이 어우러지면 그 장관이 더해져 ‘일출봉(日出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주소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1
바람이 머무는 땅
섭지코지
제주 동부 해안에서 살짝 바다 쪽으로 몸을 내민 섭지코지는 성산일출봉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절경의 명소다. 들머리에는 고운 모래가 펼쳐진 신양해변이 있고, 끝머리 언덕 위로는 봄이면 노란 유채가 드리운 평원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그 사이로 제주조랑말들이 여유롭게 풀을 뜯고, 발 아래로는 붉은 화산재 송이가 깔린 해안 절벽이 길을 이룬다. 그 위에 우뚝 솟은 전설의 바위, 선바위가 섭지코지의 풍경을 완성한다.
‘섭지코지’라는 이름은 좁은 땅을 뜻하는 ‘섭지’와, 부리처럼 길게 뻗은 지형을 뜻하는 ‘코지’가 합쳐진 말이다. 한편 지역에서는 ‘섭지’를 재사를 많이 배출하는 좋은 기운의 땅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본래는 곶 끝자락의 절벽만을 지칭했으나 지금은 해안 전체를 아우르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섭지코지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눈앞에서 마주하는 성산일출봉. 어느 계절에 서 있어도 그 장면은 오래도록 마음에 새겨지는 풍경이 된다.
- 주소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