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름,
감자가 온다

글 ㅣ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경향신문 칼럼, <고영의 문헌 속 ‘밥상’> 필자)

필자 소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의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
여름이다. 감자가 온다. 하지(夏至), 양력 6월 21일, 북반구에서 낮이 제일 길고 밤이 제일 짧은 이 날의 앞뒤에 한반도의 감자는 절정이다. 농민은 경험을 통해 하지 즈음 감자의 생육이 좋고 수확량도 많다는 점을 알았다. 아울러 혹독한 더위와 장마 속에서는 씨알이 엉망이 됨을 알았다. 여름 큰비 지나 캔 감자가 쉬이 상한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농민은 쉴 틈이 없었다. 물론 오늘날 한국인은 사계절 감자를 먹는다. 감자를 처음 만난 이래 감자 농사를 끝없이 갱신한 덕분이다. 오늘날 한반도에서는 봄감자·가을감자·겨울감자·고랭지여름감자 농사가 한 해 내내 이어진다. 2월부터는 시설감자 수확이 가능하다. 5월이면 전남에서 봄 햇감자 출하가 시작된다. 제주도는 한 해에 세 번까지도 감자를 심어 거둘 수 있다. 강원도에서는 6월부터 9월까지 감자를 거둔다. 노지감자와 저장감자가 번갈아 한국인의 밥상에 오른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감자는 곧 하지감자였다.
“그때 감자는 하지감자였어요. 가을 지나면 시장에 감자가 없어서 감자국을 못 했죠. 없으니까 순댓국 따위를 팔다가 이듬해 하지에 감자가 나오면 그때부터 다시 감자국을 했어요.”
1958년 개업 이래 서울 성북구 동선동을 떠나지 않고 ‘감자국(탕)집’을 이어온 어머니와 아들, 모자(母子) 사장님을 뵌 적 있다. 두 분 말씀이 이랬다. 그랬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감자 농가는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끼니로 먹기 위해 감자를 기르고 저장했다. 그렇게 해서 이듬해 수확 직전까지 오로지 집에서 먹어치웠다. 가을 지난 도시의 감자 품귀는 당연했다.
더 들여다보자. 감자의 고향은 안데스, 오늘날 페루의 고원 지대이다. 기원전 5천 년 즈음의 감자 재배 흔적도 이곳에 남아 있다. 감자는 4,500m 고지의 척박한 데서도 자란다. 서늘한 고원에서, 찬바람과 서리를 견디며 생명을 이어오다 온 지구로 퍼져나간 작물이 감자다. 이 작물은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래, 다시 1532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제국 약탈을 시작한 이래 고구마·고추·토마토·옥수수·강낭콩·땅콩 등과 함께 유럽을 거쳐 온 지구에 퍼졌다. 한반도에는 언제 어떻게 들어왔을까?
서유구(1764~1845)의 <행포지(杏浦志)>에는 “북저(北藷, 감자)는 근래 관북[關北, 함경북도]에서 전래하였다. 번저[番藷, 고구마]에 비해 매우 쉽게 번식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1832년 조성묵이 엮은 <원서방(圓薯方)> 또한 감자가 한반도 북쪽에서 들어왔다고 했다. 이 책에 따르면 감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오기는 북개시1)의 영고탑(寧古塔)2)에서다. 이것을 북감저(北甘藷)라 부른다.” 이규경(1788~?)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북저변증설(北藷辨證說)’에서 감자에 얽힌 이야기를 정리했다. 이 책에 따르면 감자는 조선 순조 때(1824~1825) 한반도에 들어왔고 당시에도 1)함경도 사람이 북경에서 종자를 들여왔다는 설, 2)산삼을 캐러 몰래 국경을 넘은 중국인들이 산속에 감자를 심어 먹다가 이랑에 남은 것이 조선 사람에게 퍼졌다는 설 두 가지가 나란했다. 기록이 이만큼이라면, 감자는 기록되기 훨씬 이전에 한반도 북쪽 국경을 넘어 들어왔을 테다.
1) 북관개시(北關開市). 함경도 북부에 개설된 국제무역시장
2) 오늘날의 중국 헤이룽장성(黒龍江省) 닝안(寧安) 시
감자를 접한 사람들은 그 식량 가치에 금세 눈떴다. 관리와 지식인은 구황작물로 반겼다. 전래 초기 유럽과는 달리 조선 문헌에는 감자에 대한 거부감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19세기를 지나면서는 또 다른 상황을 맞는다. 영국인, 독일인은 19세기 말에 한반도에 그네들의 감자를 들여오기도 했다. 1920년경에는 일본의 아이치산업주식회사가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 해발 650m 고지에 난곡기계농장을 열고 강원도 감자를 바탕으로 난곡 1호부터 5호까지 신품종을 개발했다. 이 농장에는 농학을 전공한 독일인들이 근무했다. 일본에서도 새 품종이 들어왔다. 예컨대 일본인 독농가(篤農家) 가와다 료이치(川田龍吉)는 1908년 아이리시 코블러(Irish Cobbler)를 미국에서 들여와 홋카이도에 심었다. 이 품종을 가와다의 작위를 따 ‘단샤쿠이모(男爵薯)’라 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남작(男爵)’으로 불렸다.
한국인의 손으로 한국 품종을 육성하기 위한 노력도 잊을 수 없다. 한국 씨감자 연구의 총본산인 국립식량과학원 고령지농업연구소의 모태, 농사원 고령지시험장이 개장한 때가 1961년이다. 어려운 시대에도 감자를 붙들고 내일을 기획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품종 육성이 어느 단계로 올라설 때까지는 다수확-내병성 품종을 도입이라도 해야 했다. 1961년 미국에서 육성한 ‘수미(秀美. 영어명, Superior)’ 그리고 1971년 일본에서 육성한 ‘대지(大地. 일본어명, 出島[でじま]/영어명, Dejima)’는 각각 1975년과 1976년에 도입되어 이제는 토착화한 대표적인 예이다. 같은 시기 눈 밝고 뜻있는 독농가와 농민은 20세기를 통과한 재래종 감자를 지키기 위해 무진 애썼다. 이윽고 1980년대말 이후에는 우리나라 자체적으로 개발한 신품종 감자 보급이 본격화한다.
한반도 감자의 연대기는 감자의 고향 안데스 못잖은 찬바람과 서리와 함께 시작했다. 감자의 통로가 된 두만강 유역, 평안도와 함경도 골짜기의 혹한과 척박함이 새삼스럽다. 이윽고는 안데스에는 없는 혹독한 더위와 장마에 맞서 감자를 품은 곳이 한반도이다. 장마 전에 캔 감자는 그저 간식이 아니라 여름 양식이었다. ‘감자는 하지감자!’ 하는 감각에는 이만한 내력이 깃들어 있다. 한반도는 감자의 고향 안데스와 비슷한 조건과 전혀 다른 조건 두가지 모두에 적응하고 대응해 새로운 감자 연대기를 다시 썼다. 여기 이르도록 감자는 척박함을 이기고 자라는 작물로, 보리타작을 하고 모를 내는 동안 먹을 양식으로, 전분의 원료로 늘 한국인과 함께였다. 앞으로도 정다운 먹을거리이자 푸근한 반찬거리로 한국인과 함께일 테지. 고맙다, 감자야. 반갑다, 감자야.
다미
금선
홍영
농촌진흥청은 우리나라 자체적으로 개발한 신품종 감자를 보급하고 있다. 해방 이후 육종육성 성과로 자랑할 만한 품종으로는 다음과 같다. 봄-가을 이어서 재배하는 ‘추백’, 항산화기능성 컬러감자 ‘자영’, ‘홍영’, 수미를 대체할 맛있고 수량 많은 ‘다미’, ‘대지’ 대신 분이 많은 ‘금선’, 감자 칩 가공용 ‘은선’ 등 새로운 품종들을 개발해 공급하고 있다.
(사진 농촌진흥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