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의 아이콘
국탕 한 그릇

글 ㅣ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필자 소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의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

국탕을 비우며 살아간다

“중식 하면 불꽃 위에서 춤추는 웍[鐵], 일식 하면 화려한 사시미 칼질이 떠오르지 않아요?”
내 스승 김경애 아트디렉터의 한마디다. 많은 분들이 고개를 끄덕이시리라 웍 또는 사시미 칼질은 중식과 일식 이야기의 출발, 그 스토리텔링의 시작점이 될 만하다. 선명하기에 파급력까지 대단하다. 그렇다면 한식은? 현장의 아트디렉터는, 실은 한식을 두고 하고픈 말씀이 있었다. 웍이나 사시미 칼질만 한 한식의 아이콘 말이다.
“모락모락 김 피어오르는 사발은 어때요? 마음까지 따듯하게 녹이는, 또는 시원하게 하는 국탕 한 그릇이 한식의 아이콘이 되지 않을까요?”
아, 그럴 수 있겠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내리쳤다. 세상에 자식을 낸 어머니의 첫국밥에 오르거니와 태어난 모든 자들이 생일마다 훌훌 마시는 미역국, 수더분한 벗 콩나물국, 젖산발효의 우아한 산미를 다시 풀어낸 김칫국과 김치찌개, 한여름에 힘이 되는 추어탕, 고기국물 내기의 진수를 뽐내는 곰탕과 설렁탕, 채소와 고기가 어울린 절정 연출하는 육개장, 바다는 물론 바닷가의 바람과 햇빛을 아우른 북엇국 등등, 국탕 한 그릇과 맞물린 추억 한 조각 없는 한국인이 있을까. 오늘도 한국인은 국탕을 비우며 살아간다. 겨우 이쯤 나열하고는 미안하다. 한반도의 모든 농수산물이 곧 국탕 또는 찌개의 재료가 되니까.

‘간’이 되어야 완성된다

국탕은 크게 맑은장국ㆍ곰국(곰탕)ㆍ된장국ㆍ냉국 등의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맑은장국은 간장으로 간한 국이다. 곰국은 동물성 재료를 오래 고은 것으로 다른 국이나 음식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된장국은 된장으로 간한 국이다. 배추된장국ㆍ시금치된장국 등의 예에서 보듯 간장간과는 다른 풍미와 질감을 만든다. 냉국은 차게 해서 먹는 국으로 물김치 못잖은 우아한 신맛과 기분 좋은 단맛을 넉넉히 낸다. 초계탕처럼 화려한 냉국도 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지는 않아도, 한여름에 사람들을 위로하기로는 여느 국탕 못지않을 테다.
어떤 한 사발이든 ‘간’이 되어야 완성이다. 간이 안 맞으면,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간의 출발은 소금이다. 소금과 콩이 어울리면 장이 된다. 소금과 수산물이 어울리면 젓갈 및 젓국1)이 된다. 국탕 한 사발에는 한식의 기본 간, 조미 방식, 맛 설계의 바탕이 깃들어 있다. 예컨대 콩과 어울린 된장, 간장 등 두장(豆醬)2)은 소금의 짠맛이 콩의 단백질과 지방을 만나 한층 맛나게 변용되고 증폭된 간이다.
소금에 고기를 더해 발효하면 육장(肉醬)이 된다. 소금이 수산물을 만나면 젓갈이 된다. 젓갈은 젓국을 낸다. 이 동아리의 음식을 한자로는 ‘해(醢)’라고 썼다. 가자미식해, 명태식해가 그 예다. 한반도 및 동아시아에 두장 담그는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고기와 생선의 동물성 단백질을 이용한 계통은 ‘해(醢)’로, 콩 단백질을 이용한 계통은 ‘장(醬)’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1) ‘액젓’은 한 제품명에서 나온 말이다. 일반명사는 ‘젓국’이다.
2) 두장의 원료가 되는 대두류의 원산지는 한반도의 함경도~만주 사이로 추정된다.

역사와 문화가 함께하는 국탕

말 나온 김에 더 가보자. 맑은장국은 동물성 단백질의 감칠맛을 ‘소금보다 맛있게 짠’ 간장으로 증폭한 한식의 기본 국물이다. 적절히 올라오는 감칠맛은 깨끗하면서도 개운하기 이를 데 없고, 그 우묵한 갈색 빛깔은 더욱 운치가 있다. 양자사태ㆍ갈비ㆍ민어ㆍ우럭ㆍ토란ㆍ송이ㆍ쑥ㆍ고기경단 등 맑은장국에 어울리는 재료를 떠올리면 오랜 세월 전해진 맛 설계의 적실함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젓갈은 어떤가. 새우젓간을 한 달걀국ㆍ콩나물국ㆍ젓국갈비 등도 재료의 감칠맛을 두장과는 다른 방향에서 끌어올린 진미이다. 말린 생선으로 국 끓이며 다양한 젓국을 쓰는 방식은 한반도 해안 어디서나 이어지고 있다.
된장을 쓴다면? 채소나 수산물의 풍미와 어울린 된장의 깊은 맛은 간장과는 구분되는 또 다른 미각의 세계를 연다. 곰국의 소금간을 새삼스레 감각해 보면 장과는 다른 구석이 단박에 드러난다. 글쓴이는 ‘소금간에는 매력적인 야성이 엿보인다’라고 말하곤 한다.
냉국은 어떤가. 지구 여기저기에 식힌 국물이나 수프를 먹는 문화가 없지는 않지만, 한국인만큼 다양한 냉국을 만들고 맛나게 먹는 민족은 없는 듯하다. 오이냉국ㆍ가지냉국ㆍ미역냉국ㆍ김냉국 등은 김치에 준하는 감칠맛 쥔 신맛을 전한다. 동치미 등과 어울리는 찬 육수는 냉면이라는 독특한 국수 문화의 견인차가 되었다. 이때에도 짠맛이 먼저 치고 올라오는 한식 간장이 핵심이다.
국탕 한 사발에 간장간, 된장간, 소금간, 젓갈 및 젓국간, 수많은 나물과 양념과 축산물과 수산물이 깃들었다. 그 역사와 문화가 함께한다. 그러니 말이다. 김 오르는 국탕 한 사발이라면 어떨까. 춤추는 웍이나 화려한 사시미 칼질 못잖은 아이콘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