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나무를 지키고 나무는 마을을 품다울진군 금강송면

글 ㅣ 김그린참고자료 ㅣ 농촌진흥청 농업기술포털 농사로(www.nongsaro.go.kr)
애국가 2절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라는 구절로 시작할 만큼 소나무는 우리나라를 상징한다.
조상들은 사람이 태어나면 생솔가지를 꽂은 금줄을 쳤고, 숨이 다하여 자연으로 돌아갈 때는 소나무 관을 썼다.
이중에서도 금강송은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단단하고 균열이 적으며 아름답기 때문이다.
경상북도 울진군에는 최고의 목재로 칭송받는 금강송이 군락을 이룬다.

푸르고 당당한 자태

경북 울진군은 경상북도 최북단에 위치한다. 백두대간의 한 축이 뻗어내려 산림으로만 이루어진 울진군의 서쪽 지역에 가면 금강송을 만날 수 있다. 늘 푸르고 당당한 자태에 모두가 감탄하게 된다. 울진군의 산림면적 비율은 85.8%로, 전국 63.2%보다 월등히 높다. 그만큼 울진군은 금강송을 오랫동안 지켜왔고, 금강송 역시 울진군 사람들을 오랫동안 보살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중 금강송면은 과거 울진군 읍내에서 서쪽에 위치하여 ‘서면’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지만, 금강송 군락지에서 유래한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금강송면’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 일대와 왕피천 유역은 금강송이 잘 보존된 지역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국내 최대 금강송 군락지로, 500년 이상 금강송과 200년 이상 금강송 등 1,000만 그루 이상의 금강송이 자생하는 지역이다.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아 금강송을 비롯한 산림자원의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송은 예부터 최고의 목재로 손꼽혔다. 궁궐과 사찰을 건축할 때 사용되었으며 배나 농기구를 만드는 데도 쓰였다. 숭례문, 경복궁, 종묘, 울진 불영사 등은 금강송이 사용된 건축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이나 왕족의 관을 만드는 데도 금강송이 쓰였다. 잘 썩지 않고 뒤틀림이 적어 관을 짜기에 적당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금강송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이 헌신해왔다. 신라와 고려 때는 국가에서 소나무를 심고 함부로 베지 못하게 했다. 조선시대에는 지방 수령들에게 소나무를 식재하도록 했다. 특히 숙종 때는 울진군 금강송면에 위치한 안일왕산이 황장봉산으로 지정되었다. 황장봉산이란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쓰는 질이 좋은 소나무, 즉 황장목을 베지 못하게 한 산이다. 그만큼 울진군 금강송은 특별한 보호를 받았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 굳건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금강송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람들

울진군은 조금 특별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곳이다. 바다와 숲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가뭄 때에도 비가 내려 금강송을 기르기에 최적지로 꼽힌다. 또한 경사지가 많은데, 과거에는 골짜기를 따라 개간한 논밭과 화 전을 경작하며 살았다고 한다. 15~20도 정도 경사지에 화전을 만들었는데, 직선거리가 100m 남짓한 좁다란 골짜기에서 화전을 일구었다. 또한 경사도가 15도 이하인 곳에서는 논 농업도 이루어졌다. 논과 금강송 군락지 사이에는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금강송과 마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풍경이다.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도 금강송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이곳 사람들 역시 금강송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다. 봄이나 가을과 같이 건조한 시기에는 순번을 정해 산불을 감시하고, 송이를 채취하는 시기에는 외지인들의 입산을 금지하여 불법 송이 채취가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했다. 또한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이 관광을 오더라도 소나무 숲길을 훼손하지 않도록 방법을 연구하여 금강송 군락지 방문객 수를 제한했다. 금강송 보존을 위해 특별히 힘쓴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금강송 덕분에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송이는 마을 주민들 생계에 크게 보탬이 된다. 동해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란 소나무 숲에는 송이버섯이 숨어 있다. 매년 10월 ‘금강송 송이 축제’를 열어 울진군 송이버섯을 더 널리 알리고자 했다. 또한 복령 역시 이곳에서 자라는 귀한 버섯이다. 소나무 뿌리에서 공생하는 복령은 약효가 뛰어나 한약재로도 사용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꼬챙이로 땅을 찔러 흙 속에서 자라나는 복령을 채취하기도 했다. 금강송이 선물한 귀한 버섯들이다.

전통문화를 잇다

금강송은 예부터 마을의 신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금강송 군락지 주변 산촌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당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마을신에게 ‘동제’라는 이름의 제사를 지냈다. 동제는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동제를 지내기 전에는 제사를 주관할 제관을 뽑는데, 해마다 두 가구씩 의무적으로 돌아가며 맡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제관이 되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
제물을 마련하고 서낭당 근처를 깨끗하게 청소한 뒤 금줄을 친다. 제사를 지내는 데 필요한 물건을 살 때는 가장 좋은 것으로 사고, 값을 깎지 않는다. 해마다 정월이면 주민들은 한마음으로 마을의 평안과 안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린다. 마을 사람들은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며 계승해왔다.
금강송 군락지는 독특하고 아름답다. 불영계곡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자리에 200년 이상 된 금강송 군락이 펼쳐진다. 그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만나볼 수 없는 특별한 경관이다. 국가에 필요한 중요한 목재를 제공해온 울진군 금강송면의 사람들. 이 아늑한 산골 마을을 지켜주는 건,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금강송이다.
경상북도 울진군
위치 |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여행 더하기 : 국가중요농업유산
한국인의 기상을 담다
울진 금강송 산지농업

글 ㅣ 김그린
경북 울진 금강송 산지농업은 우리나라 국가중요농업유산 제7호로 선정된 바 있다. 유전적 형질과 품질이 우수한
한민족의 나무, 금강송이 군락을 이룬 지역이기 때문이다. 금강송 군락지는 과거부터 왕실의 중요한 자산이었으며,
오랜 기간 주민들의 생계를 지탱해주는 터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농업유산이다.

국가 차원에서 관리해온 이유

금강송은 다른 나무들에 비해 귀한 대접을 받는다. 목재로 쓰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금강송은 재질이 단단하고 나뭇결이 치밀하여 뒤틀림이 적다. 또한 생장이 느린 편이라 나이테 사이 간격이 좁다. 이러한 이유로 예부터 나라의 중요한 일들에 금강송이 쓰였다. 또한 뿌리가 깊고 줄기가 곧게 뻗는 금강송의 당당하고 푸르른 자태에서 한국인의 기상이 느껴진다.
금강송은 일반인이 함부로 접근하여 나무를 베어낼 수 없도록 오랜 시간 보호 받아왔다. 그래서 금강송 인근에 사는 주민들은 나무를 관리하고 다양한 산림 부산물을 채취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주민들은 금강송 군락지에서 소나무와 공생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왔다.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산지농업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다.
금강송 주변에서 살아온 마을 사람들은 보통 송이버섯이나 복령과 같은 버섯을 채취하거나 그 주변에서 토종벌을 키웠다. 물론 때로는 금강송을 벌목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했다. 논과 밭이 적어 농사를 크게 지을 수 없는 형편이나 금강송 덕분에 얻을 수 있는 부산물들이 많았기 때문에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었다.

생물다양성 유지 비결

금강송 군락지 주변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한다.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1급에 속하는 수달과 산양이다. 수달은 수계 지역에서, 산양은 암반지대에서 서식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만큼 이 지역의 생태계가 건강하고 깨끗하기에 생물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셈이다. 또한 한국특산식물들도 분포한다. 세잎승마, 고려엉겅퀴, 참좁쌀풀 등이 그것이다. 하천에는 돌고기, 버들치, 기름종개 등 어류도 서식 중이다.
금강송 군락지는 사람들의 생활을 지탱하며 이어져 왔을 뿐만 아니라 동식물들에게도 건강한 환경을 제공하며 멸종위기종들을 지켜왔다. 지속적인 보전 관리 노력으로 금강송이 훼손되지 않게 보호해왔으며 풍부한 생물 다양성도 유지해왔다. 울진 금강송 산지농업은 우리의 자랑이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존중하며 배려해온 역사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