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억배추 이야기

남쪽 끝 섬에서 발견된 귀한 맛

글 ㅣ 소효령사진 ㅣ 경기도농업기술원
하루에도 몇 번씩 밥반찬으로 김치가 올라올 만큼 배추가 흔한 나라에서 토종배추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매일같이 식탁에서 마주하는 식재료지만 사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배추는 ‘호배추’라 불리는 중국배추의 개량품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현실에서 ‘구억배추’는 2008년 제주도에서 발견돼 토종배추의 명맥을 잇고 있다.

우리나라의 땅심으로 토착화된 배추

구억배추
김치의 주재료이자 우리 밥상에서 빠질 수 없는 식재료인 배추는 원래 서양 채소였다. 지중해에서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파돼 토착·개량된 것이 지금의 배추다. 문헌상으로는 고려 후기의 의서인 <향약구급방>에 ‘숭’이라는 표현으로 처음 등장했으니 꽤 오래 전부터 우리 생활에 영향을 준 작물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현재 우리가 먹는 배추의 원형은 1800년대에 중국에서 넘어와 토착화된 것으로 추정되는 ‘개성배추’다. 당시 채소 재배 기술이 앞섰던 개성을 중심으로 재배되다가 1900년대에 서울로 생산지가 옮겨지면서 개량품인 ‘경성배추’가 등장했다. 1931년 발간된 <조선총독부농업시험장 25주년 기념지>에는 배추 중 유명한 것은 경기도의 ‘개성배추’와 ‘경성배추’라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러나 점점 중국배추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임오군란 이후 중국인들이 우리나라로 집단이주를 시작하면서 산동을 비롯한 여러 중국 지역의 배추도 함께 들여온 것이다. 일명 ‘호배추’라 불리는 중국배추는 토종배추보다 감칠맛이나 씹는 맛이 떨어졌지만, 수확량이 좋고 추위에 강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토종배추와 ‘호배추’는 공존했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물량공세에 밀린 토종배추는 점차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어갔다.

아삭아삭하고 알싸한 식감이 으뜸

‘구억배추’는 제주도 대정읍 구억리의 할머니 한 분이 소중히 보존해온 배추다. 지난 2008년 토종 종자를 이어가려는 민간단체 토종씨드림 안완식 박사가 제주도에서 ‘구억배추’를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렇게 씨앗을 나누어 알음알음 재배하던 ‘구억배추’는 현재 지역에서 소규모로 재배하고 있으며, ‘개성배추’, ‘의성배추’ 등과 함께 대표적인 토종배추로 자리를 잡았다.
육질이 단단해 아삭한 식감이 특징인 ‘구억배추’는 매콤한 향과 알싸한 맛이 ‘갓’과 비슷하다. 그러나 고소함과 단맛도 지니고 있어 김치로 담그거나 생으로 먹어도 입맛을 돋운다. 또한 개량종보다 길이가 서너 배쯤 길고, 병충해와 기후변화에 강해 농약이나 비료 없이 자연재배가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특히 ‘구억배추’는 토종 중에서도 드문 ‘결구배추’다. 씨를 심은 뒤 가만히 둬도 잎이 여러 겹 겹쳐 속이 꽉 차도록 여물어 보기만 해도 탐스럽다. 비록 중국배추처럼 대량 재배가 쉽지는 않지만, 제주도 구억리 할머니가 그랬듯 지역 곳곳의 여러 농부들은 토종배추 종자를 지키고 되살린다는 책임감과 사명을 갖고 ‘구억배추’의 재배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