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에
문화예술을 입히다

보자기 아티스트·한복 디자이너 이효재 씨

글 ㅣ 김주희 사진 ㅣ 정송화
무언가를 지키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사라져가는 농촌을 지키는 일도 그렇다.
누군가는 농사를 짓고, 누군가는 농촌 자원을 소비한다.
보자기 아티스트인 이효재 씨의 방식은 문화예술의 숨결을 불어넣는 일이다.
서울과 괴산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는 그녀를 초정행궁에서 만났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보자기 아트

충북 청주에 있는 초정행궁은 1444년, 세종대왕이 121일 동안 기거하며 눈병과 피부병을 낫기 위해 요양을 한 곳이다. 한글 반포를 반대하는 무리들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업을 마무리한 곳이기도 하다. 아담한 한옥들이 자리한 이곳에서 이효재 씨는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보자기 아트 강의를 열고 있다. 지난 2020년 초정행궁 홍보대사로 임명되며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일이다.
“초정행궁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인데 그동안 관리가 부족했어요. 이곳에 오면서 담장을 쌓고 항아리를 들여놓고 숙박시설에 있는 오래된 이불들도 바꾸었죠. 매주 금요일엔 친환경 보자기를 활용한 선물 포장 기법과 전통문화, 예절교육을 진행하고 있어요. 벌써 500명이 넘는 분들이 참석했어요. 그동안 지역 주민들이 얼마나 문화예술에 목말라 있었는지 느꼈죠.”
세계적인 보자기 아티스트이자 한복디자이너, 한국의 타샤 튜터, 베스트셀러 작가… 이효재 씨를 칭하는 수식어는 화려하다. 유명세를 원해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자연히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만난 그녀에게선 들꽃처럼 소박하면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들풀 같은 강인함이 느껴졌다. 여전히 마음이 가는 일들을 자유롭게 하고 지역 주민들과 허물없이 수다를 떤다. 3년 전 괴산으로 터전을 옮긴 것도 비슷하다. 괴산에 마음이 갔고, 뿌리를 내려 보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괴산은 무척 재미있고 신기한 지역이에요. 일하면서 전국을 다 가봤는데 괴산만은 가본 적이 없었죠. ‘괴산? 괴상한 이름인데?’라며 농담을 던지곤 했는데, 처음 찾은 괴산이 제 마음에 쑥 들어왔어요. 괴산은 정말 주변에 느티나무와 산밖에 없어요. 500년 전 괴산을 그린 그림을 보면 지금과 똑같아요. 이런 변화 없음이 오히려 괴산을 미래도시처럼 느끼게 해요. 앞으로도 언제나 같은 모습일 테니까요.”

지역 축제·전통주…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다

괴산에 터를 잡은 지 3년. 일 때문에 서울과 괴산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처음엔 5도2촌이었지만 지금은 2도5촌이 되었다. 그녀의 괴산 집 주변은 칡넝쿨이 크게 자라 있다. 일과 관련된 행사를 할 때면 이 칡넝쿨을 잘라 테이블을 장식한다. 이효재 씨에겐 칡넝쿨이 작물이 아닌 문화예술을 만들어 내는 재료다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있어요. 칡넝쿨은 농사짓는 사람에겐 원수 같은 존재지만 저한텐 운치 있는 조경이 돼요. 괴산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예요. 이곳에 남아있는 산막이 옛길이나 우암 송시열이 후학을 가르쳤던 장소, 이황 선생이 나들이했다는 골짜기, 연풍이라는 아름다운 동네까지… 그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왔던 것들에서 스토리를 뽑고 함께 누릴 수 있는 콘텐츠를 새롭게 만들고 싶어요.”
그녀는 절기별로 지역 축제를 열 계획이다. 산막이 옛길을 걷고 다례(茶禮)를 함께 하고 지역 농산물로 자연주의 음식을 차리는 등 괴산을 새롭게 경험하는 축제다.
괴산 연풍면 마을에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쌀, 옥수수, 고추 등 괴산 농산물로 전통주도 빚고 있다. ‘연풍연가’, ‘두향연가’라는 이름도 붙였다.
귀농·귀촌 청년들과의 교류도 이효재 씨가 괴산에서 꾸준히 하고 있는 일 중 하나다. ‘우암차회’라는 작은 모임을 통해 같이 차를 마시며 마을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해에는 지역 내 저소득 홀몸 어르신들에게 먹거리와 생필품으로 구성된 ‘행복나눔세트’를 함께 기부했다.
“괴산에 온 청년들은 마을에 적응하는 것도 어렵고 외로움을 느끼기도 해요. 비슷한 상황에 놓인 청년들끼리 소통하는 것을 넘어 마을 어르신들과도 접점이 생기면 좋을 것 같았어요. 어르신을 찾아가 봉사하면서 그들이 기억하는 괴산 이야기를 듣고, 삶의 지혜도 배우는 거죠. 이 모든 게 괴산이라는 농촌지역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자양분이 될 거라고 믿어요.”

지속 가능한 농촌을 위한
문화예술

그렇다면 이효재 씨가 그리는 문화예술도시로서의 농촌은 어떤 모습일까. 괴산이 농촌과 문화예술의 결합으로 지속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다른 지역을 위한 샘플도시 역할도 가능할 것이다.
“예전에 우크라이나 고려인학교에서 한복의 아름다움을 보여 달라는 요청을 해서 간 적 있어요. 우크라이나에 도착해 차를 타고 어두운 흙길 위를 달리는데 양옆이 다 노란 해바라기 밭인 거예요. 6시간이나 차를 타야 했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 덕에 힘들지 않았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풍경에 감탄하고 놀란 것도 잠시, 마을에 도착한 이효재 씨는 또 한 번 놀랐다. 농업인들이 주말만 되면 정장을 차려입고 오래된 공연장에서 열리는 발레나 음악회, 서커스 등을 즐기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어요. 그리고 사람은 부러운 것을 닮아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우크라이나의 해바라기 밭, 농업인들에게 일상이 된 문화예술과 같은 콘텐츠를 괴산에도 만들고 싶어요. 우크라이나의 농촌 풍경과 문화가 제 가슴에 화살을 꽂았다고 할까요. 손상되지 않은 500년 전 모습을 갖고 있는 괴산에도 다양한 문화예술이 정착했으면 해요.”
그래서 영화가 개봉하면 일부러 괴산에서 본다며 웃는 이효재 씨다. 소멸해가는 농촌을 살리기 위한 작은 실천으로, 한 사람이 하면 미미하지만 여러 사람이 모이면 큰 힘을 발휘한다. 이효재 씨가 꿈꾸는 일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언젠가는 지속 가능한 농촌이 완성되지 않을까.
“또 다른 꿈은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괴산에 짓고 싶어요. 탈북청소년들을 위해 봉사하는 김명주 씨라는 분을 보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어요. 탈북청소년들이 음악, 미술, 운동 등 다양한 배움을 통해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하는 건 그들에게는 물론 지역 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에요. 저는 원래 제 모습으로 살았는데 시대에 의해 주목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제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모든 것을 기부하며 지역 사회, 그리고 지속 가능한 농촌을 위한 일들을 해나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