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보석,
제주감귤

글 ㅣ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감수 ㅣ 국립원예특작과학원 감귤연구소 박석만 농업연구사
사진제공 ㅣ 국립원예특작과학원 기획조정과 임선실 주무관

필자 소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의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

공을 들여야 맛볼 수 있는 과일

눈길을 확 잡아끄는 빛깔, 조형미, 매력적인 맛(더하여 향!)의 삼박자를 갖춘 과일이란 나뭇가지에 맺힌 보석이라고 할 만하다. 과수 농사를 해본 분들은 안다. 잘 익은 과일은 사람과 새와 짐승이 함께 다투는 자원이다. 예컨대 사과가 그랬다. 동아시아 사과의 역사는 황제의 정원인 상림원(上林苑)의 역사와 함께였다. 푸른 수풀에서 빛깔과 모양과 향미로 제 존재를 뽐내는 열매란 사람이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다른 동물이 채가게 마련이다.
또는 손오공이 훔쳐 먹은 복숭아 이야기도 있다. 하늘 세계의 우두머리인 태상노군(太上老君)은 특별히 선녀를 시켜 하늘 세계 복숭아를 관리했다. 복숭아 관리에 실패한 선녀는 하늘에서 추방되어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처럼 과일은, 공을 들이고 또 들여야 사람에게 돌아오는 자원이다. 한반도에서 이만한 과일을 찾는다면 ‘제주감귤’을 빼놓을 수 없다. 상고할 길 없을 만큼 아득한 옛날, 감귤의 먼 조상이 인도대륙 아쌈 지역에 나타났다. 여기서 다시 작고 껍질이 잘 벗겨지는 만다린[mandarin, 밀감[蜜柑] 동아리), 크고 껍질이 두꺼운 포멜로(pomelo, [文旦] 동아리), 레몬과 라임의 조상이 되는 시트론(citron)이 갈려 나왔다.
만다린은 특히 중국 대륙 남부의 동쪽에서, 포멜로는 그 남쪽인 오늘날의 태국과 말레이시아가 자리한 지역에서, 시트론은 그 서쪽인 인도 지역에서 더욱 진화의 속도를 냈다. 중국 대륙에서는 적어도 4,000년 전부터는 감귤을 상업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중국 절강성 (浙江省)에서 광동성(廣東省) 일대와 그 주변, 남중국해, 그리고 일본 규슈(九州) 및 세토나이 카이(瀬戸內海) 일대 감귤의 먼 기원이 이것이다.

창의와 노력으로 일군 제주감귤 연대기

앞서 거론한 지역의 한 가운데에 제주가 있다. 제주는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와 그 주변 바닷길을 오가는 모든 감귤을 품을 만한 땅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감귤이 자리 잡을 만한 땅이 제주고, 더구나 제주 사람들의 창의와 노력이 합쳐져 제주감귤 연대기를 이루어왔다.
문헌을 펼쳐 보자. 1052년 고려 문종 6년 “삼사(三司)1)에서 아뢰기를 ‘탐라국에서 해마다 바치는 귤[橘子]을 100포자(包子, 포장) 로 개정하고, 이를 항구적인 규정으로 삼으소서’라고 하자 (문종이) 이를 받아들였다.” <고려사(高麗史)>의 이 기록은 제주감귤을 명시한 한국 역사상 첫 제주감귤 기록이다. 국가의 규격[包子]까지 마련됐다면, 이보다 오래 전에 제주의 감귤 농업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다시 백 년이 지나 <동명왕편(東明王篇)>의 작가 이규보(李奎報, 1169~1241)는 제주에서 동정귤(洞庭橘)을 선물 받은 기록을 남긴다. 이규보는 동정귤을 노래하며2) “이 귤은 탐라의 바깥에는 없다(此橘, 耽羅外無之)”라고 했다. 동정귤의 모습은 “금구슬보다 둥글고 찬란한 보배(圓於金彈粲堪珍)”라고 했다. 금구슬[金彈]이란 아마도 금귤(金橘)일 것이다. 이규보는 또 다른 시에서 “진기하구나! 동정귤은/옥 같은 과육에서 시원한 즙이 흐른다(奇哉洞 庭橘/玉腦流寒漿)”라고 노래했다.3)
제주감귤은 이처럼 일찍부터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고유종, 기호와 선호에서 의미가 있는 품종을 낳은 과일이었다. 이때에도 역시 빛깔, 조형미, 맛의 삼박자다. 감귤이 잘될 만한 땅에서, 제주 사람들이 공을 들인 결과가 예부터 이러했다.
탐빛1호
옐로우볼
탐나는봉

상징성을 가진 제주감귤

제주감귤은 사랑의 열매, 유혹의 열매이기도 했다. 고려 명종 때의 인물 최비(崔斐)는 잘생긴 데다 멋쟁이였다. 최비는 태자의 거처인 동궁에 근무한 적 있는데, 이때 마침 태자의 여종이 최비에게 반해 최비를 유혹하는 데 이른다. 여종은 담 안으로 귤을 던지며 최비에게 제 마음을 전했다. 귤이 다리가 되었는지 둘은 인연을 맺는다. 둘의 불장난은 여종이 강제로 머리를 깎여 비구니가 되고서도 이어졌다. 그러다 최비가 멀리 귀양을 가게 돼서야 귤 던지기로 시작한 사랑의 불장난이 끝난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더한 상징성이 제주감귤에 덧붙는다. 당시에는 동지를 즈음해 감귤이 바다 건넜다. 감귤이 서울에 잘 들어 왔다면 전국적 행정에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아울러 조선, 중국, 일본, 유구(琉球, 오늘날의 오키나와)와 맞물린 바다가 평화롭다는 뜻이다. 종묘에서 거행한 천신(薦新)4)의 의례에 감귤이 빠지지 않은 데에는 이만한 까닭이 있었다.
죽은 조상만 위하랴. 산 조선 유생의 영광에도 감귤이 함께했다. 올라온 감귤을 기념한 과거를 황감제(黃柑製) 또는 감제(柑製)라고 한다. 행정력을 뽐내는 가운데 벌어진 과거라니, 달리 그 뜻을 설명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제주감귤 덕분에 제주 사람들은 뜻밖에 임금을 볼 기회도 생겼다. 임금은 한겨울에 제주에서 감귤을 가지고 온 사람을 친히 불러 옷과 밥을 내리기도 했다. 제주 사람들은 임금의 은택을 노려 극심하게 추울 때를 기다려 성안으로 들어 오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1) 출납과 회계를 담당한 기구
2) 이규보, <제주태수최안이동정귤견기이시사지(濟州太守崔安以洞庭橘見寄以詩謝之, 제주태수 최안[최자의 초명]이 동정귤을 보내왔기에 시를 써 사례함)>에서
3) 이규보,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 제8권 참조
4) 제철의 농수산물을 바치는 의례

농민이 만들어낸 가장 친숙한 제주감귤

이만한 역사를 지나 최근 백년, 감귤은 한반도 누구나 즐기는, 가장 익숙하고 친숙하고 포근한 과일로 자리를 잡았다. 이만큼 안전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유통되는 고품위 감귤류[citrus]는 온 지구를 통틀어 별로 없다. 한국인이 도리어 ‘한국산 제주감귤’ 소중한 줄을 모른다. 이제 극조생종에서 극만생종에 이르는 다양한 감귤류가 사철 보인다. 최근 백년 제주 사람들이 제주감귤을 갱신해 지난 제주감귤의 역사를 이어온 덕분이다.
아울러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감귤연구소와 같은 기관에서 분투해온 연구자-공무원, 공무원-연구자 덕분이기도 하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 감귤연구소에서 육성한 국산 온주밀감 품종 중 우리나라 1호 감귤 ‘하례조생’은 기존 ‘궁천조생’보다 당도는 1브릭스 높고 신맛은 20% 정도 낮아 더 달고 덜 시다. ‘윈터프린스’는 시설에서 12월 상순에 수확하는 품종으로 기존 만감류 보다 껍질 벗기기가 쉽다는 특성이 있다. 식감이 부드럽고 향기를 풍기며 진한 단맛을 느낄 수 있다.
이 외에도 매력 넘치는 국산 품종들이 풍성하다. 11월부터 1월까지 수확하는 ‘미니향’은 탁구공 크기만큼 작다. 평균 당도 15브릭스, 산 함량 0.8% 내외로 단맛이 강해 신맛을 싫어하는 소비자에게 알맞다. 12월 중순에 수확할 수 있는 ‘미래향’은 ‘황금향’을 개량한 품종으로, ‘황금향’보다 당도는 1브릭스 더 높고 껍질이 잘 벗겨져 소비자가 선호한다. 우리나라 최대 명절인 설날 차례상에는 ‘탐나는봉’과 ‘사라향’을 올릴 수도 있다.
황제의 벼슬아치, 태상노군의 선녀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오늘, 한국에서 살아가는 나는 제주감귤 농민에게 먼저 고맙다. 이만큼 해내고 있는 연구와 행정의 일선에 있는 여러분께 고맙다.
하례조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