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밥상
문학 속의 밥상

글 ㅣ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필자 소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의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
김제에서 난 융도(戎稲)로 밥을 짓되 옥보다도 윤나도록 깨끗이도 찧었네
金堤戎稲飯, 精鑿潤於玉
닭국은 들깨즙 넣어 부드럽게 끓여 내고 잉어회에는 알싸한 겨자장
鷄瀋荏糝滑, 鯉膾芥醤馥
부추김치 자못 매콤하고 미역국에 더욱 감도는 푸른빛
䪥葅味稍辣, 海帯羹更緑䪥葅
무는 사철 먹기 좋아 채소 가운데 으뜸이라
蔓菁食四時, 菜族爲宗祖
은실처럼 가늘게 채 쳐 상에 올리니 그 차림새 조촐하네
縷切銀糸細, 登盤粲可數
서울 양반 장 파총1)은 삼복에 장계(오늘날의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지역)를 지나다 그 고을 백정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그날 저녁 백정의 집 고명딸이 점잖은 나그네를 위해 정성껏 차린 여름 밥상이 이랬다. 조선 사람 김려(金鑢, 1766~1822)가 남긴 서사시 <고시위장원경처심씨작(古詩爲張遠卿妻沈氏作)>의 한 대목이다. 밥상을 들여다보자. ‘융도(戎稲)’부터 만만찮다. 융도는 ‘융조도(戎早稲)’라고도 한다. 오랑캐 ‘융(戎)’자가 단박에 드러낸다. 이 품종은 조선의 북쪽 끝, 조선과 여진의 접경지대에서 들여온 것이다. ‘조(早)’는 조생종(早生種)을 뜻한다. 훈민정음으로는 ‘되오리’ ‘되올려’ 등으로 썼다. ‘북쪽 끝 오랑캐 땅[되]에서 온 올벼[오리, 올려]’라는 말이다. 왜 들여왔을까. 조생종 벼가 보릿고개를 넘길 때 요긴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북쪽 접경의 추위를 견디는 품종이라면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 냉해에 강한 품종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관련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분명히 남아 있다.
1) 파총(把摠)은 종사품 무관 벼슬이다. 그저 ‘장 파총[張把摠]’으로 이를 뿐 작품 속에 이름은 없다.
1438년 조선 세종 20년 4월 4일 의정부와 세종은, 조선 최북단 고을인 여연·강계·자성의 조생종 볍씨 25석을 충청·경상·전라도에 보내 시험 재배할 것을 의결한다.2) 농사는 농민·독농가·국가 셋이 함께 짓는다고 말하려면 이쯤의 자료는 필요하리라. 뒤에 1438년의 그 융도가 실제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융도’는 한국 농업사의 도입육종 분투기를 생생히 증언한다. 나그네와 주인은 이렇게 역사적인 벼를 찧어 지은 밥을 놓고 마주 앉는다.
다시 밥상으로 돌아가자. 알싸함의 미각과 노랑의 색채감이 깃든 겨자장은 우리 조상이 발휘한 세련된 일상 음식 감각을 잘 드러낸다. 여름 부추김치라니, 떠올리기만 해도 흐뭇하다. 아리면 아린 대로, 달면 단 대로 사철 반찬이 되는 열무 또는 무 또한 고맙다. 한여름에는 한여름 김치와 한여름 푸성귀가 따로 있는 법이다.
동남쪽 바다에서 나 팔도의 내륙과 산악까지 구석구석 유통된 미역의 쓰임은 시대를 따질 것 없이 한결같다. 닭국에 윤기와 부드러움을 더한 들깨즙[荏糝]은 어떤가. 들깨즙은 닭고기·미역·시래기·우거지·토란·근대·머위·버섯·두부·수제비·칼국수 등과 어울려서는 음식의 풍미를 한껏 북돋는다. 흰밥의 소담함, 들깨즙 푼 닭국의 풍성함, 겨자의 알싸함, 부추김치의 매콤함, 미역국의 바다 풍미와 색채감, 여름무의 푸근함이 한껏 어울린 밥상이라니, 아끼고 가꿀 만하지 않은가.
이 밥상에는 더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장 파총은 일찍이 부모를 잃고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그는 수산업에 눈떠 음력 3월 조기·4월 도다리·5월 준치·6월 송어와 연어알과 전복·7월 숭어·8월 민어·9월 농어·10월 명태를 쫓아 조선 팔도를 돌며 호연지기를 키웠다. 아울러 보통사람들의 삶과 사는 형편을 실감하면서 인간적인 성숙까지 이루었다. 장 파총은 집주인 백정에게 하늘이 사람 사이에 귀천을 나누었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다는 말을 건넸다. “뜻이 맞으면 모두 친구, 정 깊은 사람끼리가 바로 형제(義孚皆朋舊, 情深卽兄弟)”라는 말도 뱉었다. 지금 보아도 가슴이 찌르르한 마음이요 표현이다.
이 집 주인 백정은? 삼형제와 이 밥상을 차린 고명딸 방주의 아비로서, 삼형제와 함께 푸줏간을 꾸리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또한 일찍이 어미 잃은 외동딸을 가르칠 만큼 가르치려 했다. 작품에 따르면 백정네 고명딸 방주는 여섯 살에 실을 자을 줄 알았고 일곱 살에 한글을 깨친다. 여덟 살에는 김만중의 소설 <사씨남정기>를 낭송했고, 아홉 살에는 한자도 제법 알아보게 되었다. 열 살이 되자 규방가사에도 눈떴으며 ‘산유화’와 같은 노래도 잘 불렀다.3) 딸자식은 총명했고 아비는 그 총명함에 교양이 더하도록 했다. 가르치는 마음, 인간적인 성숙을 바란 마음에는 남녀노소도 상하귀천도 없었다.
장 파총은 앞서 장계의 시냇가에서 빨래하던 방주와 우연히 마주쳤고, 방주가 떠준 한 표주박의 물을 달게 얻어 마신다. 그 짧은 순간에 장 파총은 이름 모를 소녀의 찬찬함에 반한다. 방주는 정장을 하고 승용마를 갖추어 탄 서울 양반에게 움츠리거나 굽실대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예의바르게 응대했을 뿐이고, 어디까지나 여행자에게 베풀 만한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다.
장 파총은 여행길에 하룻밤을 묵어도 이만큼 딸자식을 길러낸 집에 신세지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 파총은 방주가 차린 밥상을 받고는 그 조촐함에 또 한 번 놀란다. 그러고는 당시 사람대접 받지 못하던 백정, 방주의 아버지에게 겸상까지 청한다. 장 파총은 이어 결심한다. 이 집 딸 방주를 내 며느리로 삼겠다고. 서울 내 아들과 장계 백정의 딸을 정식 혼인으로 맺어야겠다고. 아쉽게도 작품은 미완성이거나 원고의 뒤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아쉬움을 아쉽게 달랜다. 그래도 이만한 밥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았다. 이 여름에 꼭 한 번은 나누고 싶은 문학 속의 밥상이다.
2) 고영, 「융도, 두 자의 뭉클함」,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포도밭출판사, 2019.
3) 민요 음악 어법인 ‘메나리’ 또는 노동요 ‘산유화가(山有花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