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을 일깨우는 식재료,
들깨

글 ㅣ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필자 소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의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
한반도는 들깨의 땅이다. 고랭지 아니라면 배추가 녹는 철에도 들깨는 왕성히도 자란다. 날빛이 지면을 달굴수록 깻잎의 향은 진동한다. 깻잎은 늦가을 노지에서 잎에 노랑이 감돌기 직전까지도 짙푸르다. 대단한 생명력이다.
한국인은 아득한 오래전부터 들깨와 들깻잎을 적극적으로 또 알뜰살뜰 써왔다. 기름으로 다가 아니다. 들기름을 필두로 들깨즙·들깨가루·들깨송이부각·깻잎부각·깻잎나물·깻잎쌈·깻잎찜·깻잎전·깻잎장아찌·깻잎김치 등등, 온 지구를 통틀어 예가 없는 다채로운 사물을 만들어냈다. 멋진 식료품이자 향신 채소인 ‘깻잎’ 활용은 한반도에서 유난했고 오늘날에도 그렇다.
들깨의 고향은 인도 및 동남아시아로 추정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인 <농사직설(農事直說)>(1429)에도 보일 만큼 본격적인 재배의 역사도 길다. 문헌 기록은 늘 농업과 식생활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 고고학은 더 깊은 내력을 말한다. 예컨대 안산·고성 신석기시대 유적, 논산·부여·아산·천안·김천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들깨 및 들깨 재배의 흔적이 확인된다.1)
들깨는 서민대중에게 참깨에 맞먹는 작물이었다. 한자어를 살펴보자. 들기름의 한자어는 ‘법유(法油)’이다. 법유란 법식(法式)에 따라, 엄격한 품질 관리를 거쳐 나온 기름이라는 뜻이다. 관리에 따라 만들고 유통하는 요긴한 일상의 사물, 들기름은 예부터 그런 대접을 받았다. 또 다른 한자어로는 ‘소유(蘇油)’가 있다. 이 어휘는 조선 세조 때 편찬된 <월인석보(月印釋譜)>(1459), <훈몽자회(訓蒙字會)>(1527) 등에서 확인된다. 임금이 편찬한 명예로운 출판물인, 상당한 한문 교양을 전제로 한 어학서 안에서도 ‘들기름’은 꼭 있어야 할 사물이고 어휘였다.
1) 국립문화재연구소, 『동아시아 고고식물자료집』, 선사시대 한국편, 2015.
버섯들깨탕
기름으로 이어온 들깨는 한국 음식 문화 속에서 들깨즙이라는 또 다른 멋진 사물로 벋었다. 칼국수·미역국·머위탕·연포탕 등에 어울린 들깨즙은 음식에 한층 윤기를 더한다. 조갯살을 삶은 물에 삶은 숙주와 고사리, 토란대를 넣어 끓이다가 들깨즙과 불려 간 쌀과 삶은 조갯살을 넣어 끓이는 남해안의 들깨즙 활용 방식도 정말 멋지다. 머위·토란·미역·조개·닭고기·달걀·두부 등 재료와 들기름의 만남인 제2, 제3의 풍미를 낳는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있다. 오늘날 한국인은 들깨·들기름·들깨즙·깻잎의 용법과 용처를 얼마나 섬세하게 감각하고, 또 잘 알고 있는가. 얼마나 잘 쓰고 있는가. 한반도의 다음 세대는 이를 이어갈 준비가 돼 있을까. 들깨즙만 해도 그렇다. 들깨즙도 단순하지 않다. 순들깨즙, 쌀가루와 함께 내는 들깨즙, 거피들깨즙이 다 따로였다. 집집마다 이 셋을 내 입맛에 맞게 따로 썼다. 쌀가루와 함께 낸다고 하면 들깨와 쌀가루의 비율을 염두에 두었다. 점도·농도·향·빛깔·질감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들깨즙에서 쌀가루의 비율이 높으면? 보다 부드럽고, 보다 걸쭉해진다.
‘생각하면서’ ‘감각하면서’ 해온 사람들은 들깨를 갈 때에도 그저 ‘곱게 간다’가 다가 아니다. 칼날에 휙 갈아 내린 들깨즙과 돌확(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에 부수어 내린 들깨즙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주방용 가전제품에 당장 한계가 있겠지만, 돌확 원리의 적정기술 가전제품을 상상할 만하다. 기관이 먼저 기계기술에 다가설 수도 있겠다.
일상의 사물이란 낯설게 돌아볼 때에만 내 감각을 일깨운다. 다시 볼 때에만 차이가 보인다. 들깨즙을 너무나 쉽게 대체하는 들깨가루는 어떤가. 바로 휙 갈아 들깨향의 야성을 강조한 들깨가루는 그것대로 쓰임이 따로 있다. 하지만 들깨즙 내기가 귀찮아서 들깨가루를 쓰는 감각이라면? 그걸로 다면 들깨가루도, 들깨즙도 붙들 수 없다.
깻잎은 어떤가. 깻잎지만 해도 간장·된장·젓갈(특히 멸치젓) 가운데 어디에 깻잎을 박느냐에 따라 풍미와 질감이 다르다. 떠올려야 떠올릴 수 있는 차이다. 깻잎김치 또한 겉절이 방식이 다르고 오래두고 먹는 방식이 다르다. 푸르고 여린 깻잎과 노랑이 감도는 가을 단풍깻잎의 풍미와 질감은 다르다. 깻잎김치를 할 때 깻잎을 살짝 쪄서 쓰는 경우, 소금물을 담갔다 쓰는 경우가 또 다 다르다. 그러고 보면 깻잎김치에 찹쌀풀을 쓰는 집도 여전히 있다.
들기름은 지금 잘 쓰고 있나? 볶음에서, 낙지 또 낙지의 사촌격인 식료와 만나 맛을 더하기로는 들기름만 한 기름도 다시없다. 감자만으로 하거나 감자와 북어가 어울린 뽀얀 곰을 할 때에도 들기름은 일반적인 식용유로는 불가능한 향미와 질감의 마술을 부린다. 늘 먹는 식료라고 하면, 특히 달걀과 두부를 지지는 방식으로 조리할 때 들기름의 특장점이 확 살아난다. ‘생나물에는 참기름, 향이 덜한 나물이나 묵은 산나물에는 들기름’ 하는 감각도 잊을 수 없다.
올리브유를 쓰는 데라면 웬만하면 들기름을 쓸 만하다. 아니 들기름에는 올리브유와는 또 다른 개성과 매력이 한가득이다. 샐러드라고 했으니 ‘드레싱’을 불러내자. 마찬가지다. 드레싱에서 올리브, 올리브유의 활용에 못잖은 가능성이 이미 들깨·뜰깨즙·들깨가루·들깻잎페스토·들기름에 깃들어 있다. 여기다 우유, 커피와 손잡은 들깨 음료, 전통적인 강정과 떡, 과자와 빙과까지 이미 갱신과 실험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어온 들깨의 용법과 용처는 오늘날 들깨 갱신과 실험을 되비출 수 있다. 사물에는 보겠다고 작정을 하고 봐야 보이는 구석이 있다.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익숙한 들깨를, 깻잎부터 들기름까지, 굳이 이렇게 호명하는 이유다.
들깨칼국수
산초들기름두부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