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에 거주하며 반도체·LCD 분야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시절, 가장이었던 김명덕 씨의 소원은 딱 한번이라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직접 밥상을 차려주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야근은 가족과의 저녁식사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힘겨운 몸을 이끌고 퇴근을 한 뒤에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앞섰다.
“어느날 금융관리사를 만났는데 우리 세대는 120살까지 살게 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근처의 퇴직한 친척이나 가족, 선배들을 봐도 퇴직 이후에는 삶이 없었어요. 그저 초조하게 퇴직금만 바라보고 있었죠. 그때쯤 밤낮없이 일하다 실명 위기까지 겪게 됐습니다. 그때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습니다.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김명덕 씨의 머릿속에서는 퇴직한 선배의 이야기가 떠돌았다. ‘직장생활은 남의 일이야.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손에 움켜쥘 수 있는 일을 해라.’ 오랫동안 숙고하던 김명덕 씨의 결론은 귀농이었다. 하지만 아내인 하미경 씨는 남편의 갑작스런 귀농 결정에 극렬히 반대했다.
“아내는 제가 농촌에서 과연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걸 검증해보라는 숙제를 냈어요. 그래서 무작정 농가에 찾아가 온갖 시련을 겪으며 딸기 생육 기술을 배웠습니다. 문전박대를 당한 경우도 많았어요. 제 의지를 높게 산 아내가 나중에는 마음을 돌린 거죠.”
도시 토박이의 귀농은 쉽지 않았다. 알맞은 농토를 구매하기 위해 꼼꼼히 따지는 사이 8개월이 흘렀고, 어렵사리 구매한 땅에 시설하우스와 집을 짓기 시작하자마자 착수금을 받은 건축업자가 잠적해버렸다. 그 사이 딸기 파종 시기는 지나고, 집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며 머무르던 방의 월세 계약이 끝나며 온 가족이 길 위로 나앉을 위기를 겪게 됐다.
“제가 고생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아내와 어린 아들이 고생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어요. 눈 딱 감고 지금이라도 도시로 돌아갈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오히려 아내가 조금 더 해보자고 저를 위로해주더라고요. 남들이 10년 동안 겪을 일을 우리 가족은 불과 몇 년 사이에 다 겪었다고 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