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나라 씨앗을 안 쓰고 일본에서 돈을 주고 살까?’ 농촌에서 자랐던 최응규 대표는 어릴 때부터 종자에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어렴풋하게 일본산 종자와 국산 종자의 차이를 인식하기 시작했던 최응규 대표는 수입산 종자를 판매하는 종자회사를 눈여겨봤고, 이후 성장하며 농업을 전공하여 연구원으로 직장생활을 했다. ‘떡잎부터 육종가’였던 셈이다.
“어릴 때는 그저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일본 씨앗을 안 산다면 아버지가 나한테 용돈을 더 줬을 텐데, 그 돈으로 사탕이라도 하나 더 사 먹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작은 곳에서의 생각들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던 것 같아요. 좋은 씨앗을 개발하면 동네 어른들이 좋아할 거고, 돈이 많아지고, 온 동네 친구들도 다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이것이 채소 육종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중앙종묘 육종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최응규 대표는 1995년 1월 과감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때부터 ‘개인육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에는 개인육종가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수입산 종자 중개상이었던 ‘통일장춘종묘’를 인수한 최응규 대표는 한국 농업의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목표로 육종연구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일본 종자회사에서 함께 연구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당시 고령군 성산면의 멜론단지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육종가들로부터 같은 문제를 함께 연구하자는 제의를 받았죠. 파파이야멜론의 수확시기 때 찾아오는 시듦병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일본 육종가들이 우리나라보다 사정을 더 정확히 알고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또, 함께 연구하고자 하는 의지도 더 강했고요.”
최응규 대표는 일본의 공동연구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내병성 파파이야멜론을 개발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산·학·연이 힘을 합쳐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일본을 보며 ‘우리나라의 개인육종가들에게도 농촌진흥청이나 산·학·연이 매치되어 신품종을 개발할 기회가 더 주어졌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