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아니라 밭이다
담양 대나무밭
글 ㅣ 김희정자료 ㅣ 농촌진흥청
사시사철, 아니 하루 안에서도 풍경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일홍이며 월영즉식이라는 말이 이어져 온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를 뒤집으면 대나무가 전통적으로 사랑받은 이유가 나온다. 물론 실질적으로 다양한 살림살이의 재료가 되었던 것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날이 차고 바람이 심할 때나, 햇빛이 난만하게 비치는 온화한 날에나
변함없이 푸르른 모습을 보이는 대나무의 자태가 사람들의 마음을 끈 것도 사실이다.
특히 담양은 우리나라의 대나무를 말할 때 빼놓으면 섭섭한 곳이다.
우리나라 전체 대나무 분포 면적에서 담양이 34.4%를 차지할 정도이니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대나무를 심었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대나무도 취하고
사람도 취하는 날
담양의 대나무가 정식으로 문헌에 기록된 것은 1452년 발간된 세종실록의 부록 중 하나, 세종실록지리지이다. 담양은 이 당시 담주로 표기되었는데 이 지역의 공물로 대껍질 방석을 비롯해 오죽, 화살대, 죽순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미 그 당시에도 대나무를 심고 다양한 세공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풍습을 따르면 담양과 대나무의 관계는 고려조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죽취일이다. 현대의 식목일처럼 대나무를 옮겨 심는 날인데 담양을 비롯한 남쪽 지역에서는 단오보다도 더 큰 명절로 삼았다고 한다. 담양의 죽취일에 대해 정확히 기록된 자료는 없지만 고려 무신정권 당시의 문인이었던 이인로가 읊은 ‘죽취일이죽’이라는 시를 통해 고려시대에도 죽취일이 성행했을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헌데 이 죽취일의 뜻이 재미있다. 문자 그대로 ‘대나무가 취하는 날’이라는 뜻인데, 본디 대나무는 고집이 세서 옮겨 심으면 그대로 죽어버린다고 한다. 하지만 이 죽취일만큼은 대나무가 자신을 다른 데로 옮겨도 모를 정도로 취한다고 하여 이날 대나무를 옮겨 심는 명절이 된 것이다. 오전에는 대나무를 옮겨 심고 오후에는 대나무 잎으로 만든 청주를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하니 죽취일만큼은 사람이나 대나무나 사이좋게 취하는 날이었다.
귀가 젖는 대나무밭,
모두의 은신처가 되다
대나무 군락지를 대체로 대숲으로 부르지만 담양에서는 대나무밭으로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제 홀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심고 가꾸며 여기에서 나오는 각종 산물을 효율적으로 이용한다는 점이 숲보다는 밭에 가깝다. 이처럼 인간의 손이 닿아 만들어진 대나무밭이지만 날짐승, 들짐승을 비롯해 각종 음지식물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한다. 그늘이 많고 유기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다양한 식물종이 나타날 수 있고, 이러한 식물종이나 대나무 열매, 수액 등에 끌린 짐승들도 대나무밭을 찾게 된다. 특히 대나무밭에는 약 100종이 넘는 버섯이 자생하는데 망태버섯을 비롯한 식용버섯, 약용버섯, 항암버섯 등이 포함되어 있어 농가소득에도 큰 도움을 준다.
대나무밭 수령에 따라 주변에서 자생하는 식물들도 다르게 나타난다. 대나무밭이 처음 조성될 때에는 망초, 찔레나무, 가죽나무 등이 대나무와 경쟁하듯 자라난다. 허나 13년 정도 지나면 대나무밭이 그늘을 드리우면서 맥문동, 쇠무릎 등의 음지식물로 주변 식생이 탈바꿈하게 된다. 버섯이 많이 자생하는 것도 토양 속 수분을 붙잡아둔 채로 그늘을 만들어주는 대나무 특유의 생태 덕을 본 것이 크다.
한편 대나무 특유의 땅속줄기는 주변 식생과 더불어 사람들에게도 안온한 주거지를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땅속에서 줄기가 뻗어나가면서 폭우나 홍수에 흙이 깎여나가는 것을 막아주고 센 바람도 걸러주는 방풍림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죽순이나 대잎처럼 식재료와 차로 가공되는 것이나 일상생활용품으로 쓰이는 것은 일일이 손으로 헤아리기도 어렵다. 재미있는 것은 습기 있는 환경을 좋아하고 잘 자라는 대나무지만, 처음 조성할 때만큼은 모래나 자갈이 섞여 배수가 잘 되는 양토가 적합하다는 것이다. 처음 뿌리를 내릴 때에는 퇴비를 붓고 왕겨를 뿌려 수분 증발을 막아주되 이후에는 대나무 자체적으로 수분을 붙드는 만큼 배수가 잘 되는 땅에 심는 것이 생육에도 유리하다.
마을마다 다르고, 집집마다 다른 담양 죽물
담양의 죽세공은 마을에 따라 달라진다. 각자 심는 대나무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마을마다 주로 다루는 공예품도 달랐다. 또한 마을의 집집마다도 차이가 있었다. 대나무를 잘라 얇게 쪼개는 것만 하는 집이 있는가 하면, 대나무 겉면을 인두로 지져 특유의 무늬를 만들어내는 것만 하는 집도 있었다. 그런 만큼 마을 단위로 두레를 구성해 분업 형태로 일을 하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죽물은 주로 담양 천변에 열린 죽물시장에서 거래되었다. 당시 담양 천변은 장소가 넓고 자갈이 깔려 있어서 죽물을 땅에 놓아도 흙이 묻지 않았다. 수많은 죽물을 늘어놓고 거래하기에 맞춤이었던 셈이다. 거기다 마을마다 다루는 죽물이 다르니 한데 모여 죽세공품이 진열된 모습만으로도 장관이었다.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 것이 죽물시장이라 다른 지역에서 만든 죽물도 이 곳에서 팔렸다. 전국에 하나밖에 없는 시장이었기에 이 곳을 거쳐야만 상품의 가치와 가격이 정해지는 것도 죽물시장이 성행한 이유였다.
중국산 저가 대나무 제품과 플라스틱 제품이 들어오면서 죽물시장의 위세도 예전만 못하지만, 죽물을 계승하려는 담양사람들의 노력은 오롯이 살아있다. 죽제품 경진대회를 통한 고품질의 공예품을 발굴하는 것과 함께 죽세공예 양성을 위한 기능전수자 관리 등이 그것이다. 대나무공예명인을 지정해 전수교육을 함으로써 명인들의 기술이 잊히지 않도록 교육한 덕분에 아직도 담양의 200여 가구에서 죽세공품을 생산하고 있다.
1923년 일본에 의해 폐지되었던 죽취일을 대나무 축제로 다시 부활시킨 것도 담양의 대나무 문화와 죽세공품을 활성화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대나무 축제 때 올리는 죽신제가 마을의 전통을 보여준다면, 죽세공품 전시회나 대나무 악기 경연대회 등은 대나무 소비를 실질적으로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전국 유일의 대나무 축제인 만큼 담양의 특성을 반영한 독특한 향토축제를 통해 과거를 현대적으로 계승한다는 목적을 매해 되새기고 이어나가는 셈이다.
대나무밭이
가꿔내는 미래
‘대밭 한 마지기를 논 다섯 마지기와도 바꾸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대나무 한 속이 벼 한가마 값에 거래되는데, 한번 대밭을 조성하면 특별한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니 실로 알짜배기 재산이었다. 허나 죽세공예산업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대나무를 이용한 신산업 육성의 필요성이 꾸준히 대두되고 있다. 그중 담양에서 가장 성공한 신산업으로 관광산업을 빼놓을 수 없다. 관광형 대나무밭으로 조성한 죽녹원, 우리나라의 전통 조경을 보여주는 소쇄원 대숲 등이 대표적이다. 특유의 서늘한 온도로 마음 속 열까지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풍광은 여름철의 피서지로도 손색이 없다. 휴일이나 주말의 죽녹원에는 5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온다는 사실도 대나무밭의 관광자원 가치를 입증하는 예다. 죽통밥이나 죽엽주, 죽엽차 등 담양의 향토요리로 자리 잡은 대나무 요리들도 담양 여행의 즐거움이다.
한편 건축업, 섬유산업, 바이오산업 등에 대나무를 이용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대나무를 이용해 바이오에탄올을 생산한다거나 잘게 부순 대나무로 만든 펠릿 등이 그 예다. 대체에너지의 중요성이 늘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식량작물보다 값싸고 빨리 자라는 대나무가 이상적인 원료가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편 대나무 섬유도 의류나 첨단산업의 소재로서나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산업으로서 각광받고 있다. 3D 프린트의 소재로 활용되거나 인공근육에 쓰이는 복합섬유의 소재로도 쓰일 수 있는 만큼 전통적인 섬유산업에서 탈피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살아있는 금밭으로 불렸던 대나무밭이 새롭게 그 이름을 되살릴 수 있을지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