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흙살림 토종연구소에서 보관하고 있는 토종종자의 수는 1,500여 종에 이른다. 매해 활용하는 종자는 달라지지만 언제라도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저온에서 보관하고 있다. 농촌진흥청 종자은행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안완식 박사로부터 다양한 종자를 분양받기도 하고 토종종자 수집단도 운영하면서 확보한 종자들이다. 2010년에는 충북 괴산군 안에서 300종이 넘는 토종자원을 수집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1910년대에 기록된 ‘조선도품종일람’에서 조선 경성부에서 재배되던 재래종 벼가 메벼는 19품종, 찰벼가 7품종에 달합니다. 키가 큰데 쉽게 쓰러지지 않는 특징을 가진 ‘백석벼’ 같은 경우에는 충북 단양 일대에서도 재배되었죠. 200년 전 임원경제지에 나온 ‘목움추리벼’ 같은 경우에는 키가 작고 이삭목이 짧은 대신 알곡이 빽빽하게 달린 것이 특징이었고요. ‘돼지찰벼’같은 경우에는 국제슬로푸드 생물다양성재단의 맛의 방주 목록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닌 벼들이 한 지역 안에서도 다양하게 재배되고 있었지만, 지금은 이런 품종들이 농사용 종자로 쓰이는 것을 쉽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다양한 품종들이 쉽게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은 육종학의 발달이 이뤄낸 결실을 대변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수량이 많고 병에 강한 우수 종자들을 개발해내고 이를 보급하는 과정에서 손이 많이 가는 옛 종자들은 뒤로 밀리기 쉽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도 토종종자를 찾지 않는 만큼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자원이 사라지는 것도 한순간이다. 건물은 설계도가 있다면 화재가 난 뒤에도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생물자원은 그렇지 않기에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토종종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방식의 농법도 같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재래종 벼 같은 경우에는 땅에 비료를 많이 줄수록 쉽게 쓰러지는 경향이 있는 품종도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전통 농법은 텃밭 이상의 규모로 키우는 경우가 쉽지 않습니다. 규모를 키우면 이를 소비할 소비자도 있어야 하는데 어지간히 시장 접근성이 없으면 불확실성을 안고 가기가 어렵거든요. 일부 소비자 조직에서는 관심을 많이 가지지만, 가성비 문제도 있어서 소명 의식으로만은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토종종자가 이어져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생물자원 그 자체의 중요성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측하지 못한 기후 변화가 닥쳐왔을 때, 다양한 유전자원을 활용해 새로운 종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토종종자의 매우 기초적인 부분이다. 토종종자에서 유래된 식문화적인 정체성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도 큰 문제점이다. 가공식품으로 배고픔을 달래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지만 그 지역에서만 나오는 맛을 느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단순히 종자의 우수성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특이한 다양성의 가치들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 큰 문제다.
“유럽의 포도주 산업은 그 지역의 전통적인 포도를 쓰죠. 같은 품종을 미국에 가지고 와서 심어도 지역에 따라 포도 맛이 달라집니다. 와인이나 포도 식초 등에 빈티지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이런 지역성, 품종성, 역사성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식문화에서도 가능합니다. 토종의 다양성이 받쳐주고 지역별로 특색 있는 종자들이 유지된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일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