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씨앗 순환으로
우리 삶에 씨앗을 심다

수원씨앗도서관 박영재 관장

글 ㅣ 김희정사진 ㅣ 한상훈
수원씨앗도서관 박영재 관장이 농업에 눈을 뜬 것은 2004년,
‘수도권 생태유아공동체’에 근무하면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친환경 식자재를 공급하는 일을 한 것이 그 시초다.
식자재가 생산되는 과정을 알아보고 친환경으로 농사를 짓는 생산자들을 만나다 보니
스스로 농사를 지어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특히 각종 종묘회사에서 생산한 품종이 아니라 토종씨앗으로 농사를 지었을 때 그 맛은 남달랐다.
결국 귀농운동본부에서 주관한 토종씨앗수집단 대열에 합류해 전국을 구석구석 누비며 토종씨앗을 모은 것이 어언 10년에 이르렀다.
지금은 지역별로 토종씨앗을 수집·보급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춰졌다.

씨앗도서관,
고유종을 모으고 육성하다

박영재 관장이 씨앗도서관을 처음 착안한 것은 2013년 토종씨드림에서 토종씨앗을 수집·증식하는 일을 맡았을 때다. 토종씨앗의 양이 적었기 때문에 하나하나 모종을 심어야 했는데, 또 혼자서 심기에는 모종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토종종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씨앗과 모종을 나누는 ‘씨앗도서관’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당시 토종씨드림에서는 지역에 상관없이 전국 각지의 씨앗을 모아 육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역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서는 토종씨앗을 원래부터 심어왔던 지역에 보존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에 지역별로 씨앗도서관을 설립하게 되었다. 현재 서울 강동구, 경기 광명시와 수원시, 안양시, 강원 춘천시, 경북 포항시, 충북 괴산군, 충남 공주시, 예산군, 홍성군 등에 씨앗도서관이 운영되고 있다. 이밖에도 현재 개관을 준비 중인 곳이 10곳에 이른다.
수원씨앗도서관
수원씨앗도서관
“씨앗도서관에서는 도서관이라는 말 그대로 토종씨앗을 책처럼 빌렸다가 농사에서 거둔 토종씨앗을 다시 반납하는 시스템으로 이뤄지고 있어요. 회비를 낸 회원들 중심으로 나눔이 되고 있지요. 현재 생태순환농업을 살려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는데, 정작 토종씨앗은 순환되지 않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씨앗도서관의 활동이 곧 지역의 토종씨앗을 그 안에서 다시 순환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고무적인 건 농업을 시작하는 청년들이 토종씨앗에 관심을 가지고 찾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귀농하는 사람들도 토종씨앗을 재배해 틈새시장에서 판로를 찾아내기도 한다. 다만 소규모로 재배하기 때문에 유통에 한계가 있고 가격이 다소 높은 편이라는 단점이 있지만, 현재 청년농부와 귀농인들이 토종씨앗에 관심을 가지면서 희망을 조금씩 찾고 있는 중이다.

토종씨앗,
모으고 농사짓고 분류하다

수원씨앗도서관 박영재 관장
박영재 관장은 정기적으로 비무장지대를 인접한 지역으로 토종씨앗 수집을 나선다. 강화도부터 강원도 고성군에 이르는 넓은 지역 곳곳을 다니며 토종씨앗을 수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북녘이 고향인 실향민들이 많아 대대로 보관해온 토종씨앗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령의 실향민들이 대부분이라 시간이 많지 않다는 조급함이다. 토종씨앗이 후대로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통일이 되는 날이 오겠지요. 그때 수집한 북녘의 토종씨앗들을 다시 그 지역으로 되돌려 보내고 싶어요. 우리 토종씨앗을 보관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거든요. 토종씨앗은 다양성을 지킨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안에는 토종씨앗을 대물림해온 사람의 인생과 그 지역의 문화가 담겨 있습니다.”
토종씨앗을 수집하면서 농사는 어떻게 지어왔는지, 명칭은 무엇인지, 어떤 방법으로 먹는지 등의 다양한 정보들도 함께 수집한다. 토종씨앗을 대물림해온 이들의 지식과 재배법은 토종씨앗의 특징을 파악하는 데 한줄기 등불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토종씨앗에 이름이 따로 없는 경우에는 우선 지역명을 붙여요. 때로는 대물림해온 분들의 이야기 속에서 특징을 잡아 이름을 짓기도 하지요. 한 번은 정선에서 콩을 수집했는데, 그 콩을 키우신 농부님이 말하기를 이 콩 품종이 옛날부터 맛있기로 유명했다고 설명하시는 거예요. 거기에서 착안해 ‘정선 감미콩으로 할까요?’라고 여쭤보니 아주 좋다고 하셨지요. 또 농서로만 확인했던 토종씨앗을 찾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 옛 농서에서 보았던 이름을 농부의 입으로 들으면서 복권에 당첨된 듯한 즐거움을 느끼곤 해요.”
이렇게 수집한 토종씨앗을 실제로 심어보면 다양한 특성들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특성조사를 위해 심는 토종씨앗의 종류는 1년에 600종, 그중 벼만 해도 50종에 달한다. 비슷한 품종이 있다면 같은 것인지 아닌지 조사하고, 나눔을 할 때도 섞이지 않도록 최대한 분리한다. 가끔은 수집했을 때부터 혼종이 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심고 나서 특성이 발현될 때 따로 빼서 심는 식으로 섞이지 않게 재배한다.
“제주도에서 겉보리를 수집해서 심었는데 싹이 난 것을 보니 검은 겉보리가 섞여 있었어요. 그래서 검은 겉보리를 골라내 따로 심으니 그 중에서 또 쌀보리가 나오더라고요. 그렇게 특성이 다른 종자를 계속 분리해서 심다 보면 한층 다양한 토종종자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배추나 갓을 심을 때도 이렇게 특징이 뚜렷한 종자들이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러면 그 포기만 따로 빼서 순도를 유지하는 식으로 품종을 구분지어 나갑니다.”

지역의 향토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기를

지역마다 다양한 토종씨앗을 보존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통해 증식을 하면서 이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토종씨앗마다 고유한 맛이 있는 만큼 이를 활용해 향토음식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안성시에서는 갓, 배추씨, 무씨 등 다양한 토종씨앗으로 소스를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 특히 갓 종류는 머스터드소스를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있다. 뿌리갓, 청갓 등으로 다양한 맛을 지닌 머스터드소스를 만들어 시연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토종 벼와 콩 중에 버들벼, 베틀콩이라는 품종이 있습니다. 버들벼는 자라면서 이삭이 축축 늘어지는 모습이나 하얀 까락이 나와서 일렁이는 것이 마치 능수버들 같은 모습이라 버들벼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공주시를 비롯한 충청도 일부 지역에서 재배되어왔던 품종인데 밥을 지어보면 요즘 나온 벼보다 훨씬 맛있고 향도 좋아요. 또 베틀콩은 전라도에서 고소한 맛을 일컫는 방언인 ‘베틀’에서 붙였어요. 맛이 뛰어나 많은 사랑을 받았던 토종 콩이지요. 현재 이러한 토종씨앗들이 지역에서 재배된다면 시장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습니다. 소비자들의 다양하고 까다로운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토종씨앗의 보급도 활성화되겠지요.”
수원씨앗도서관 박영재 관장
토종씨앗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만큼 이를 알리기 위해 스토리텔링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온라인상에서 토종씨앗 지도를 제공하고, 지도상에서 토종씨앗의 이름을 클릭하면 수집된 과정과 보관하고 있던 농부, 맛과 재배법, 품종의 특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스토리맵핑 형식이다. 토종씨앗에 대해 관심이 있는 귀농인과 소비자들에게 더욱 다양하고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작업이다. 이는 곧 토종씨앗의 소비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박영재 관장의 생각이다.
“토종씨앗이나 묘종을 분양함으로써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토종씨앗을 접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다음 세대로 대물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특히 새롭게 농업에 뛰어드는 청년농부나 귀농인들이 토종씨앗을 의미 있게 써줬으면 합니다. 앞으로 씨앗도서관, 그리고 토종씨앗 수집·보급 활동을 통해 더 많은 토종씨앗이 우리의 삶에 들어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수원씨앗도서관

토종씨앗에 대해 관심이 있는
귀농인과 소비자들에게
더욱 다양하고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