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에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를 보통 청동기 시대로 추정한다. 울릉도에서 발견된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서 울릉도의 농업에 대해 언급되는 것은 고려 시대까지 올라가야 한다. 현종 9년(1018년) 우산국에 이원구를 통해 농기구를 내려주었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이 그 예다. 조선시대 때 쓰인 ‘태종실록’에는 울릉도에 대해 ‘우마와 논이 없지만 콩 한 말을 심으면 2~30석, 보리 1석을 심으면 50여 석이 나며 대나무가 큰 서까래 같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그만큼 울릉도의 토양이 비옥하고 밭농사 위주의 경작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울릉도의 비옥한 양토는 한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곳으로 변했다. 당시 기승을 부렸던 왜구의 침탈로부터 섬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쇄환 정책이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1883년 고종의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되기 전까지는 쇄환정책을 거부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울릉도의 거주자였다. 이후 54명의 주민이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농지개척이 이루어졌다. 초기 거주지는 울릉도의 유일한 평지인 나리분지를 중심으로 거주했다. 당시에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넓은 구릉지에 옥수수, 감자, 조 등의 식량 작물 위주 재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류와 설치류가 작물에 입히는 피해며 가뭄 피해가 극심해 자연 채취도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울릉도의 밭 농업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한 1950년대부터다. 정기 여객선이 다니며 외부와의 교류가 수월해지기 전까지는 약초와 마늘 등 환금 작물 위주의 농업이 이루어졌다.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산채 위주로 작목이 전환된 것은 환금작물의 연작으로 인한 생산량 축소와 얇은 표토로 인한 토양 유실을 방지하는 방법으로 도입된 것이다. 본래 자생하는 산채들인 만큼 급경사인 밭에서도 잘 자랄 수 있었다. 산채들의 대다수가 다년생 작물인 만큼 표토를 붙들어주는 피복 역할을 하면서 토양 유실을 최소화한 것도 산채의 작물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는 농업소득의 85%를 차지하는 작물이 산채일 정도로 그 비중이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