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세계일주 떠난
파밍보이즈
딸기 농사꾼으로
돌아오다!

온나농장 권두현 대표

<파밍보이즈>는 농사로 지구를 구하고픈 지황, 꿈을 찾고픈 하석, 고향을 멋지게 가꾸고픈 두현까지
세 청년이 모여 농업세계일주를 떠난 영화다.
13개 나라 35곳의 해외농장에서 농사를 도우며 다양한 농업인들을 만난 청년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이들은 각자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중 고향을 멋지게 가꾸고 싶었던 권두현 씨는 고향에서 딸기농사를 지으며 꿈에 한 발짝 다가가고 있다.
권두현 씨의 에세이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딸기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딸기 농사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우리만의 농업세계일주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 7년이 지났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일들을 이 글을 통해서 새롭게 되새겨 보게 된다.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일만 하던 어린 시절이 지독히도 싫고 부끄러웠는데 왜 난 지금 딸기 농사를 하고 있을까? 농사가 너무 싫어 공대로 진학을 했는데 왜 희망이 없다고 하는 농대로 편입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을까? 졸업 후 안정적인 곳에 취직을 하라고 그랬는데 왜 난 누구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농업세계일주를 다녀왔을까? 그러고 또 왜 농사를 하고 있을까?
그 답은 나만 알고 있다. 그냥 좋아서였다. 하루는 공대에서 사귄 친구들을 시골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나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주위 경치 좋은 곳을 데려가 구경시켜주기도 하고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산 정상까지 올라가 너무 좋지 않느냐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여름에는 저 강에서 수영을 하고 겨울에는 얼음이 꽁꽁 얼면 스케이트를 타고 눈이 오면 공동묘지에 가서 눈썰매를 타곤 했던 곳이다. 다양한 추억들이 똘똘 뭉친 우리 동네였다. 이어 부모님이 농사짓는 딸기 하우스에서 딸기 체험을 시켜주었다. 그때 그 순간 개구쟁이처럼 체험을 하며 웃고 있는 친구를 보았고 그 순간 뭔가 번뜩 떠올랐다.
내가 농사지은 딸기도 아닌데 친구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까 좀 뿌듯하네? 그럼 내가 기른 딸기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떠나보자!
무일푼 농업세계일주

그날 이후 나의 추억들이 남아 있는 이 동네에서 딸기 농사를 지어 보자고 마음먹었다. 뿌듯함 때문이었다. 다음해 바로 농대로 편입을 했고 2년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고민에 빠졌다. 바로 농사를 지을까 아니면,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해볼까?
학교를 다니며 농업 해외연수를 여러 번 다녀오면서 느낀 점이 있었는데 세상은 넓고 배울 것은 많다는 것이었다. 나의 젊은 시절을 곧바로 시골에 들어가 농사짓는 게 후회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결심을 했다. 농업세계일주라는 것을 가보자고!!
곧바로 어학공부를 시작했고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그래도 필요하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청년 두 명을 만나게 되었고 그렇게 우리 세 명은 농업세계일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13개 나라 35곳 농장들을 경험하고 돌아왔다.
정말이지 운 좋게도 한 제작사가 우리의 여행하는 모습들을 촬영해 주었고 그 영상들이 <파밍보이즈>라는 영화로 전국 영화관에서 개봉도 하고 다큐멘터리로 방송에도 나오게 되었다. 영광스러운 일들이었고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여행 중에 한 아주머니가 그랬다. “너희들이 여행을 통해 느낀 영감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줬으면 좋겠다”라고. 그렇게 우리는 청년들 또는 많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며 알찬 시간들을 보냈다.

누구든 농장으로 온나!

2015년 드디어 내가 바라고 원했던 딸기 농사를 시작했다. 처음은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시작했다. 결과는 싸움판이었다. 부모님과의 의견 충돌로 조용한 날이 없었고 결국은 하우스 2동을 따로 짓겠다고 선언하고 하우스 5동 중에서 2동을 내 마음대로 농사 지었다. 나름 농대를 나와서 어느 정도 지식은 있었기에 소중하게 키웠다. 자신감이 생겼다.
마침 옆 동네에서 먼저 농사를 시작한 후배가 있었다. 열정과 패기만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 후배였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고 무언가 함께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연히 이웃한 곳에 저렴한 가격으로 하우스 6동을 임대할 수 있었고 우리는 함께 농사를 지어보기로 했다.
둘 다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초짜 농부였기에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냥 모든 것을 부딪혀본 것이다. 어려움이 많았지만 우리는 아직 젊었기에 시행착오를 계속 겪었고, 그러면서 우리는 단단해져가고 있었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실패와 좌절은 젊음으로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우리 지혜의 능력치는 점점 상승곡선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가 많은 실패를 하면서도 농사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처음부터 너무 큰 도전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만약에 우리가 처음부터 어마어마한 시설에 투자를 하고 해마다 상환해야 하는 부담감을 느끼며 농사를 짓다가 한 해 실패를 했더라면 얼마나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입었을까?
하지만 우리는 그 정도 포부도 없었고 차근차근 밑바닥부터 해나가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했기에 비록 농사하는 데 어려움은 많았지만 반대로 즐거웠던 순간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도 가끔 그때 농사를 할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후배들과 ‘온나농장’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온나’는 경상도 사투리로 ‘오세요’라는 뜻이다. “밥무로 온나”, “일하러 온나”, “술무로 온나” 등 이와 같이 농장에 와서 함께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함께하는 시간동안 충분히 그 의미를 다 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