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속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과정을 통해
치유의 길로 나아가다

에버팜협동조합 최숙 대표

글 ㅣ 김주희사진 ㅣ 황성규
전북 완주군 화산면의 작은 채소정원에는 봄을 맞이하는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서너 명의 사람들이 담장을 다시 튼튼하게 보수하고 텃밭엔 퇴비를 뿌렸다.
한편에서는 잡초를 솎아내고 씨앗을 심었다.
그 노련한 모습은 수십 년 농사를 지은 농부들 같지만 이들은 에버팜협동조합원들로
지난 2015년 완주에 내려오면서부터 텃밭을 가꾸고 채소를 길러내기 시작했다.
작은 부분 하나까지도 세심하고 정성스러운 손길로 가꾸는 이유는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변화의 시작이 된
동네 어르신들과의 만남

에버팜협동조합 최숙 대표
에버팜협동조합은 채소정원과 커뮤니티 공간에서 어르신과 어린이, 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치유농장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에버팜협동조합 최숙 대표는 프로그램이라는 단어는 에버팜협동조합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무엇을 하겠다고 계획을 한 것이 아니라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이 원하는 것을 듣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게 전부라는 것이다.
“처음엔 치유농장을 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에버팜협동조합은 다섯 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돼 있는데 완주군 성인대안학교에서 처음 만났어요. 환경 분야에 관심이 많으니 자연스럽게 농업과도 연관이 되더라고요. 공통과제로 텃밭을 배우고 직접 경험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텃밭을 계획하게 되었죠. 우리가 은퇴를 했을 때 신체·정신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곳을 만들자고 의견을 모으게 된 거예요.”
최소한의 비용으로 농업과 조경이 어우러진 공간을 함께 만들어나가고자 에버팜협동조합을 설립했지만, 세상일은 계획처럼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완주군 화산면이라는 공간에 자리를 잡으면서 자연스럽게 동네 이웃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인연은 에버팜협동조합을 다른 길로 안내했다.
“차근차근 공간을 꾸미는데 동네 할머님들이 아침마다 저희 텃밭 앞을 지나며 운동을 하셨어요. 어르신이니 먼저 인사를 드렸는데 그렇게 며칠 지나니까 먼저 ‘먹을 거 심느냐’라고 말을 걸어주셨어요. 다음날엔 할머님이 시집올 때 가져오신 씨앗이며 완두콩, 청오이 모종을 가져다 주셨죠.”
그렇게 조금씩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열어 나갔다. 하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최숙 대표의 마음에 남는 말이 있었다.
“항상 ‘언제 죽을지 모르겠어’, ‘죽는 게 항상 걱정이지’, ‘내가 이 나이에 무얼 할 수 있어’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할머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공간에서 무언가를 같이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특별한 건 아니었어요.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면서 무료함을 달래주는 거였죠. 또 연세가 있으시니 밥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든 일이었는데, 저희 텃밭에서 키운 채소로 함께 밥을 지어 먹으니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어요.”
에버팜협동조합 식생활 우수체험공간 인증 명패
에버팜협동조합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치유공간

에버팜협동조합 최숙 대표
그렇게 외로운 어르신들과 함께하며 활동에 조금씩 ‘치유’라는 개념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거창한 계획이나 꿈이 있어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지역 어린이들과의 만남도 그렇게 시작됐다.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이 지역에 불쌍한 아이들이 많다고 하셨어요.봉사활동으로 지역아동센터에서 음식을 만들어주시는데 아이들 영양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시더라고요. 아이들에게 다양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여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나이엔 바른 식생활을 확립하는 게 무척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초등학생인 아이들에게 먹고 싶은 걸 물어보자 돌아오는 대답은 콩국수나 잔치국수였다. 일반적으로 그 나이엔 피자나 치킨이 먹고 싶을 만도 하건만, 이 지역 아이들에게 이러한 음식은 생일 때나 한 번 먹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당시에는 식습관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판단을 했어요. 아이들에게 다양한 음식을 접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먼저였죠. 그래서 1년 동안은 수제피자, 수제햄버거, 스파게티, 또띠아 등 다양한 음식을 먹였어요. 그렇게 1년을 보내니까 그때부터는 먹고 싶은 음식을 다양하게 말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지금은 ‘채소정원’에서 오색무지개놀이를 통해 식생활 미각교육을 하고 있어요. 노란색, 빨간색, 흰색, 초록색, 검정·보라색 등 다섯 가지 컬러가 들어간 채소를 심고 수확해서 다양한 맛을 음미하고 음식도 함께 만들어 먹어요. 제철 농산물에 대한 소중함과 균형 있는 영양소를 섭취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지요.”
작은 텃밭으로 시작한 에버팜은 점차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특별히 알리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알음알음 에버팜을 알게 된 이들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성인 장애 인들과의 만남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마땅히 어울릴 만한 공간이 없던 이들은 에버팜에 한 달에 두 번 모여 함께 소통하고 농업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그 활동 중 하나가 1박 2일 김장캠프로, 장애인들이 함께 배추와 파를 심은 후 김장철에 수확해 김치를 담그고 수육을 만들어 함께 먹는다. 별 거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이들에게는 일상에서 쉽게 경험해볼 수 없던 일들이다.
“치유에 정답은 없어요. 제가 기준을 둘 수는 없죠.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맞춤형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그들이 원하는 걸 잘 보고 듣고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게 제가 할 일이에요. 그분들이 만족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것도 있네’, ‘괜찮네’라는 정도로만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치유가 아닐까 싶어요.”
에버팜협동조합 최숙 대표

치유에 정답은 없어요.
제가 기준을 둘 수는 없죠.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맞춤형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그들이 원하는 걸 잘 보고 듣고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게
제가 할 일이에요.

일상생활 속에서 농업활동을 통한
사람 중심의 치유농장이 활성화되길

에버팜은 지자체 공모사업 등을 통해 지원금을 확보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수익을 내는 구조는 아니다. 지원금으로는 프로그램에 필요한 실비 정도만 겨우 충당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1년 단위로 공모사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연속성과 관련된 부분에서도 고민이 많다.
“에버팜에 오시는 분들은 짧게는 1년, 길게는 2~3년 동안 오세요. 그런데 사실 1년은 너무 짧아요. 1년은 서로를 파악하는 단계이고, 2년부터는 우리가 이런 걸 하는 구나를 알게 되는 단계에요. 3년부터가 ‘우리 이것도 하고 싶다’라는 게 생기는 단계거든요. 그래서 치유농장을 운영하다보면 참 아쉽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한 이들의 작은 변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최숙 대표였기에 더욱 아쉬운 마음이 크다. 처음 에버팜에 왔을 때는 도화지를 검은색 색연필로 가득 채우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초록, 빨강, 노랑 등 다양한 컬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나이에 무슨 일을 하냐’라며 자꾸 움츠러들던 어르신들이 먼저 요가가 하고 싶다고 말하고, 천연비누를 멋있게 만들어내어 작은 전시회도 열었다. 표정이 없던 이들이 한층 밝아지고 건강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치유’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고 느꼈다.
에버팜협동조합 최숙 대표
“올해는 무슨 프로그램을 하는지 묻는 어르신들이 많아졌어요. 삶의 원동력이 생긴 거죠. 몸에 좋은 식품을 먹고 병원 치료를 받으며 건강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진정한 건강함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에버팜을 앞으로도 건강한 농장으로 잘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장기적인 측면을 봤을 땐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하지만, 여전히 고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수익을 내기 시작하면 치유농장이라는 방향성이 훼손될까봐 걱정스러운 거죠.”
어르신, 어린이, 장애인, 일반인 등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에버팜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고 삶의 활력을 찾고 있는 최숙 대표. 현재 치유농장에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이라며 조심스럽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치유농장은 치유적 환경 조성과 더불어 대상자와 각 분야별 전문가가 함께 장기간 꾸준히 참여해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접근이 가능해야 하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치유농장 운영에 관심이 있다면 농업의 사회적 가치나 지역 여건에 맞게 방향성을 찾아가셨으면 합니다. 농업활동 안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과정과 관계가 중요함을 당부 드리고 싶어요. 앞으로 농업과 타 분야와의 사업영역 확장을 통해 다양성과 지속 가능한 사람 중심의 치유농장이 더욱 활성화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