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석실 우하영의
생애와 농학사상

글 ㅣ 경기사학회 최홍규 회장(전 경기대 사학과교수)
현재와 미래를 예측·대비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보라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농업은 꾸준한 발전을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다양한 문제들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취석실 우하영의 생애와 농학사상을 살펴보고
앞으로 우리 농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해 보자.

소농으로 농사를 지으며
학문을 영위하다

18세기 말 정조가 선친 사도세자의 묘 현륭원 천봉을 계기로 읍치를 옮겨 근대적인 계획도시로서 신도시 수원(화성)을 건설하던 시기에 활동한 수원부 출신의 대표적인 실학자가 바로 우하영(禹夏永, 1741~1812)이다. 그는 17세기 말 이래 근기학파(近畿學派) 내지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중농적이고 경세치용의 학풍을 계승 발전시킨 남인계의 개성 있는 학자였다.
그는 청년기 과시(科試) 실패 후 향촌에서 매우 영락(零落)한 가운데 소농으로 농사를 지으며 학문을 영위하였다. 이때 그는 저서에서 ‘지옹신(至翁身) 신익궁(身益窮)’이라고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스스로 술회하였다. 중년 이후에도 빈궁한 처지를 벗어나지 못해 저술 『농가총람(農家摠覽)』 속에서, 집안의 장례비용 때문에 손수 농사짓던 “13두락의 논 전부를 방매(放賣)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할 만큼 어려운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더욱이 그의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준 것은 세속적인 향촌인들의 모욕과 조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절을 타고난 데다가 자긍심의 소유자였던 그는 이때부터 과거제의 문란과 성리학의 몰시대적 무의미성을 깊이 인식, 성호학파의 중농적 실학 학풍을 계승, 민생 보자(補資)의 실용지학을 탐구하는 데 기울어졌다.
이 무렵 그는 세속적인 데에 안주하지 않고 전국을 답사·유력(遊歷)하면서 세태를 관찰하고, 자연지리와 인문지리적 환경을 고구(考究)하는 데 힘썼다. 특히 각 지방의 지세·토질·물산·도로·풍속 등을 조사하고 군사적 요충(關防), 장시와 농촌 실태, 관제의 편부(便否)와 요역·군역·전세·공납의 경중(輕重), 관리들의 대민(對民) 행정 실태 등을 목도하면서 민생보자(民生補資),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사상을 구상하는 데 힘썼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난하고 불우한 삶을 영위하는 민중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 형편을 개선시키는 데 크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근기(近畿)지방 출신의 선배 학자, 예컨대 이이(李珥)·조헌(趙憲)·이수광(李·光)·허목(許穆)·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 등과 유성룡(柳成龍) 등 경세가의 경세치용적 학문·사상을 일정하게 계승하면서, 민본·중농적 입장에서 국토의 이용과 농업정책·농업기술·농업개혁론을 전개하였다.
우하영은 중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향촌에 칩거하면서 30여 년에 걸친 노작 『천일록』 11권을 집필하면서 재야의 학자이자 농촌지식인으로 시종하였다. 그중에서도 농학과 농정, 농민과 농촌 문제에 대한 탁월하고 각별한 인식은 『천일록』 속에 『농가총람(農家摠覽』, 『전제(田制)』, 『관수만록(觀水漫錄』, 『어초문답(漁樵問答』 등과 『수원유생우하영경륜(水原儒生禹夏永經綸)』 등의 저술 속에 집중적으로 드러나 있다.

농업생산력 증진을 위한
강력한 권농정책 역설

우하영의 『천일록』을 비롯한 그의 저술에 나타난 향촌사회에 대한 지방사적 시각과 사상적 특징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18세기 말 대표적인 농업이론가의 한 사람이었던 우하영은, 『농가총람(農家總覽)』, 『전제(田制)』, 『부농정(附農政)』, 『수원유생우하영경륜』 등을 통하여 위기에 직면한 농민경제를 안정시키고 국부(國富)의 충실화를 기하려면 먼저 농업생산력의 증진이 필요하다고 보고, 무본의식(務本意識)의 고취와 강력한 권농정책을 역설한 바 있었다. 그는 이러한 권농정책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권농관제(勸農官制)의 활성화와 농관(農官) 운영절목의 제정·시행을 요청하였다.
특히 그는 당시 향촌사회에서
일반화된 비생산적인
나농(懶農)과 유수(遊手)의 풍조를
국가적 차원에서 강력히 징치(懲治)하는
농촌통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해이된 향촌사회의 결속과 재흥을 위한 대안의 하나로 풍속교화와 상부상조의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한 농촌의 자치조직으로서 향약(鄕約)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조선후기 수원지방의 향약으로 거의 유일한 우하영의 『향약설』은 근기지역 향촌사회의 실상과 농업진흥 문제와 결부되어 그 문제점을 이해하는데 좋은 단서가 되어준다고 하겠다.
둘째, 농업정책·농업기술·농업경영을 포괄하는 『천일록』의 농업론은 경기지역, 그중에서도 수원을 중심으로 한 그 지역적 사정을 짙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17세기 말 이래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의 경우, 이앙법의 수전농 적용이 일반화되면서 호부층(豪富層)의 토지겸병과 광작(廣作)의 확대로 인해 소농민의 분해현상을 향촌사회의 일대 위기로 파악, 특히 나농광작(懶農廣作) 현상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소농층의 토지이탈과 토지생산성을 저하시키는 나농풍조는 바로 대다수 소농민을 위협하고, 향촌사회는 물론 국가적으로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관점에서 정농사상(精農思想)에 입각한 집약적 소농경영론을 주장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상품화폐경제의 진전과 신도시 화성이 상업도시로 발전하던 시점에서 상업적 농업의 필요성을 적극 권장하기도 하였다. 즉, 그가『천일록』 도처에서 주곡(主穀) 중심에서 미나리, 무 등 도시근교의 채소농업을 권장한 것이라든지, 담배를 제외한 목면, 인삼, 생강, 닥나무, 대나무, 옻나무 등 특용작물의 유용성과 상품화를 주장한 것이 그 예이다. 이것도 발전하는 시대현실에 대한 전진적인 관점과 함께, 소농의 입장에서 농민경제의 안정을 목표로 삼았던 그의 농업론의 일단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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