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2026 Vol.247

March 2026 Vol.247
그린 Poeple > 셀럽의 식탁

모든 맛에는
역사가 담겨 있다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음식은 지역의 고유한 식재료와 조리법, 식습관 등을 담아내며 그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화 코드다.
그래서 모든 음식에는 나름의 역사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역사 커뮤니케이터 최태성이 음식과 역사를 연결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작업을 꾸준히 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록 지금은 바빠서 식사를 거르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언젠가는 전국의 노포(老鋪)와 맛집을 다니며 음식에 담긴 역사와 산업의 흔적을 많은 이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박진아 ㆍ 사진 김정호

최태성 역사 커뮤니케이터

역사 커뮤니케이터 최태성이 한국사를 전공으로 선택한 이유는 너무나 평범했다. 학창 시절 다른 과목에 비해 역사 과목 점수가 잘 나왔고, ‘내가 역사를 잘하나 보다’라는 착각 속에 사학과를 전공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학에서 배운 역사는 이전까지 그가 알고 있던 것과 달랐다. 그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많이 알고 있으면 역사를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학창 시절의 그에게 역사는 그저 암기의 영역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배운 역사는 역사적 사실 뒤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의 한 분야였다. 그때부터 최태성은 제대로 된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으로서의 역사를 널리 알리는 역사 커뮤니케이터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Q. ‘역사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데요. 역사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역사는 사람이 걸어온 흔적, 곧 발자취를 모아놓은 것이잖아요.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역사가 똑같이 반복되진 않아요. 하지만 그 안에는 패턴이 있어요. 우리는 그 패턴을 살피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좀 더 건강한 모습을 그려낼 수 있겠죠. 비슷한 패턴이 있으니까요. 이런 점에서 역사는 우리가 좀 더 나은 사회,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Q. 그럼 역사 커뮤니케이터 최태성에게 가장 울림을 주었던 역사적 한 장면은 무엇인가요?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죠. 그 시기에 정말 어마어마한 부자가 있었어요. 바로 이석영이라는 분인데, 그분이 가진 전 재산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조 원 정도입니다. 그분은 나라가 망하니까 모든 재산을 처분해요. 그 자금을 들고 만주로 가서 학교를 짓고 무상교육으로 독립군을 양성해요. 이렇게 세워진 학교가 신흥무관학교로 이어져요. 제가 그분의 평전을 보다가 멈춘 장면이 있어요. 그분이 1930년대 돌아가셨는데, 사인(死因)이 아사(餓死)인 거예요. 후대 사람들만큼은 식민지 조국의 백성으로 살지 않게 하겠노라는 꿈 하나로 자신의 삶을 채워오신 거예요.

생각해보니 그분의 꿈이 곧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이더라고요. 그 장면에서 ‘내가 참 많은 사랑을 받았구나’라고 느꼈고,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역사를 알리는 사람으로서 이런 사실을 좀 더 많은 분께 알리고 싶습니다.

Q. 이석영 선생님의 일화도 결국 국력이 약해 일어난 슬픈 역사인 것 같아요. 농업도 국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네. 중요하죠. 유명한 말이 있죠.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농업이 천하의 가장 근본이 된다는 뜻이죠. 또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농업 국가였잖아요.

Q. 그럼 농업 발전, 농촌 진흥을 통해 우리나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사례가 있나요?

우리 역사에서 농업은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지만,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점은 바로 17세기 이후인 조선 후기입니다. 모내기법이 일반화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사회 전반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모내기법은 농업에 투입되었던 노동력을 크게 줄였고, 농업기술을 가진 사람에게 힘이 집중되는 계기가 되었죠. 조선 전기에는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이 노비를 통해 대농장을 경영했지만, 조선 후기로 오면서 모내기법으로 인해 지주 전호제, 즉 소작제 중심의 계약 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또 일자리를 잃게 된 농민은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며 살아가는 임노동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상업과 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지며 신분제도를 위협하였습니다. 반만 년 역사를 놓고 볼 때, 조선 후기 농업기술의 발전은 사회 전체를 뒤흔든 결정적인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모내기법, 이앙법의 보급은 조선 시대 정부의 주도하 에 진행된 국가적 사업이었나요?

사실 모내기법은 조선 후기 새롭게 등장한 농업기술은 아닙니다. 이미 조선 세종 때 편찬된 『농사직설』에도 소개되어 있어요.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죠. 그 이유는 모내기법이 실패 위험이 큰 농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내기할 때 비가 오지 않으면 벼가 말라 죽어 한 해 수확을 전혀 하지 못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많은 물이 필요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국가 차원에서 권장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정부 주도하에 저수지를 보수하거나 새로 조성하면서, 물 공급이 한층 안정되었고 이에 따라 모내기법도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사례가 조선 시대 농촌 진흥을 위한 대표적인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음식에 담긴 역사를 함께 소개하는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모든 맛에는 역사가 있거든요.


Q. 퓨전 사극 드라마를 보면 음식 재료가 요리 경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혹시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음식 재료가 있었을까요?

통일벼죠. 획기적이었어요. 우리나라가 참 가난했잖아요.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한된 농지에서 어떻게든 생산량을 늘려야 했는데, 품종 개량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통일벼가 보급되며 쌀 생산량이 크게 늘었고, 이는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대를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지금 나오는 쌀에 비하면 맛은 좀 부족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었어요.

Q. 예전부터 꾸준히 음식과 역사를 잇는 작업을 해오셨어요. 음식과 역사를 주제로 한 방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강연도 하시고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먹는 걸 좋아해요. 나중에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이 있는데, 우리나라 유명 맛집 중 노포(老鋪)나 각 지역을 상징하는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을 다니면서 음식을 맛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음식에 담긴 역사를 함께 소개하는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그게 제 꿈입니다. 모든 맛에는 역사가 있거든요. 음식을 맛있게만 먹는 게 아니라 그 음식에 담긴 역사, 산업의 흔적을 알면서 먹으면 더 맛있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지금은 너무 바빠서 한 끼를 챙겨 먹기도 쉽지 않지만요.

Q. ‘유별난 역사 한 끼’ 프로그램에서 역사 속 인물들의 한 끼를 소개하셨었는데, 최태성만의 유별난 한 끼를 뽑으면 어떤 음식이 있을까요?

기억해보면 여름방학에는 항상 외삼촌 댁으로 보내졌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우리 집에 쌀이 없었다고. 방학하면 온종일 집에 있고, 또 한참 클 때라 얼마나 많이 먹었겠어요. 그게 감당이 안 되니까 외삼촌 댁으로 보내셨던 거예요. 그때 외삼촌 댁에서 하얀 쌀밥을 먹었는데, 그 쌀밥이 그렇게 맛있었어요. 또 거기에 반찬으로 고기 산적을 먹었는데,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아, 그리고 기억나는 한 끼가 더 있어요. 아버지가 복덕방, 지금의 부동산이죠? 부동산 중개업을 하셨는데, 계약을 한 건 체결하셨던 것 같아요. 그날 외식을 했어요. 제 기억으로는 우리 가족 최초의 외식이었는데, 그때 먹었던 음식이 돼지갈비였습니다. 네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 있고, 고기를 구워주시는데 그 장면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Vol.247
2026년 0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