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2026 Vol.247

March 2026 Vol.247

그린 Culture > 고서 탐구

고영 ㆍ 도움 이종남 고령지농업연구소 농업연구관

작가 약력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



어려울 때는 구황, 좋은 날에는 별미

“칠월 초순에 밭 갈고 씨를 뿌려서는(七月初耕種)/곡식 가운데서 맨 나중을 도맡지(能專殿後權)/옥 같은 꽃은 이슬 머금고 피어나고(玉花含露發)/검은 열매는 서리 맞고도 단단하네(玄實冒霜堅)/국수를 내리자면 희게 찧을 노릇이고(作麵舂宜白)/만두를 빚자면 천 번이라도 치대고 볼 노릇(烹饅擣可千)/겉껍질은 어디에 쓸까?(衣皮何所用)/갈무리해 흉년에 대비해야지(藏蓄備荒年)”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문집인 『동춘당집(同春堂集)』 속 한 대목이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둘 다 평생 동지로서, 근엄한 유학자였고 강골의 정치가로 조선 후기 성리학과 정치를 주도했다. 그 둘이 이렇게들 무를 좋아하고 무나물을 잘 먹었다. 예부터 한반도의 무에는 상하귀천이 없었다. 모든 이의 밥상에서 친구처럼 편안하고 반가운 먹을거리였다.

조선의 시인 이응희(李應禧, 1579~1651)가 『옥담시집(玉潭詩集)』에 남긴 시 ‘목맥(木麥)’1)의 전문은 이러하다. 목맥은 곧 메밀을 가리킨다. 이응희는 메밀과 함께 쌀·벼·메기장·찰기장·메조·차조·보리·밀·콩·팥·녹두·율무·수수·참깨·들깨에 시를 부쳤다. 위의 시 그대로다.

메밀은 음력 7월 상순까지 씨를 뿌리기만 하면 음력 9월에 수확과 갈무리가 가능하다. 그 역할은 무엇이었나. “곡식 가운데서도 맨 나중을 도맡지”라고 옮겼지만 시구 속 ‘전후(殿後)’라는 말은 더 들여다볼 만하다. ‘전후’란 ‘행군의 맨 끝에서 행군을 엄호하는 부대’ 또는 ‘퇴각하는 군대의 맨 뒤를 맡아 적의 추격을 끊는 부대’를 뜻한다. 전근대 한반도 농업에서 메밀은 곧 ‘전후’였다. 예전에 메밀은 보통은 벼를 벤 뒤, 밀·보리·조2)보다도 늦게 뿌렸다. 그러면 지역에 따라서는 만생종 벼보다 먼저 익기도 한다. 메밀은 짓는다기보다 그냥 두었다. 그러고도 일정한 소출을 기대할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마지막 보험 같은 작물이었다. 겉껍질마저 구황에 쓰였다. 저 시구를 다시 읽는다. ‘메밀은 행군이나 퇴각의 맨 뒤에서 어렵고 위험한 군사 작전을 도맡는 부대와도 같은 존재라네.’

평년의 메밀은 별미의 바탕이었다. 밀농사가 고르지 않던 시절, 밀은 고급 전분용이나 제과용의 귀한 식료품이었다. 일단 국수에서 메밀가루가 밀가루에 앞섰다. 17세기에 쓰인 조리서 『음식디미방』3)의 첫 항목이 ‘면’이다. 이때의 면이란 반죽을 일컫는 말이기도 했다. 이 항목에 따르면 메밀 5되에 녹두 1복자4)를 섞어 빻아, 체로 치고, 키로 까불면 희고 고운 반죽용 가루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을 익반죽해 틀에 누르면 좋은 사리를 받을 수 있다. 오늘날의 막국수와 똑같다. 이응희의 시구대로다. “국수 내리자면 희게 찧고” 볼 일이다.

‘면’ 바로 다음 항목이 ‘만두법’이다. 그 시작이 이렇다.

“모밀가루 장만하기를 마치 좋은 면가루 같이 가는 모시에나 깁에 뇌어5) 그 가루를 덜어 풀 쑤어 응이죽(녹말죽)같이 쑤어 눅게(부드럽게) 말아 개암열매만큼 떼어 빚으라.”




이어지는 감각, 이어지는 일상생활

밀가루반죽 만두피는 이 항목의 끝에 나온다. 기본값은 메밀가루이고 밀가루는 그 뒤다. 국수틀에 내린 메밀국수는 동치미·김칫국물·기름장 등과 자연스레 어울렸다. 이야말로 현대 한국인의 막국수·냉면·비빔국수 등의 기원이다. 또는 만두와 같은 호사스런 별미에서는, 그야말로 치대고 또 치대며 어떻게든 소를 감쌀 만큼의 물성을 잡아냈다. 다시 이응희의 시구처럼 ‘천 번’ 치대면 아무튼 만두피로 쓸 만한 끈기가 잡혔으니까.

홍석모(洪錫謨, 1781~1857)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음력 11월 항목에 남긴 냉면 이야기를 이어 읽는다.

“메밀국수를 무김치, 배추김치로 양념하고 돼지고기를 곁들인 것을 냉면이라고 한다. 또 여러 가지 채소와 배·밤·쇠고기 편육·돼지고기 편육 등을 넣고 기름간장을 쳐 비빈 것을 골동면(骨董麵, 비빔국수)이라고 한다. 평안도의 국수가 제일이다(用蕎麥麵, 沈菁菹菘菹和猪肉, 名曰冷麵. 又和雜菜梨栗牛猪切肉油醬於麵, 名曰骨董麵. 關西之麵最良).”

방신영(方信榮, 1890~1977)의 『조선요리제법』 1917년판에서도 마찬가지다. 방신영이 국수를 논할 때에 기본은 메밀국수였다. 밀국수는 따로 항목을 잡아 썼다. 만두 항목에서도 “만두는 백면가루(메밀가루)나 밀가루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여 메밀가루를 앞세웠다. 또는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 1937년판에서는 밀만두와 메밀만두가 대등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국수만큼은 역시 메밀국수가 기본이었다. 동시대의 저술가 이용기(李用基, 1870~?)도 그랬다. 국수의 기본은 메밀국수였다. 만두에 대해서는 “백면가루[蕎麥末]나 밀가루로 만드는 것인데 백면가루가 제일 되느니”6)라고 했다. 메밀에는 이만한 의의가 있었다. 못잖게 이어진 메밀묵은 어떨까. 19세기 말에 쓰인 『시의전서(是議全書)』 속 ‘메밀묵법’이 이렇다.

“메밀을 쓿어 키로 까불러서 물에 데쳐 담갔다가 일어서 건져서 빻아 체로 걸러 쓴다. 눅고 되기를 맞추어 쑤되 뭉근한 불로 때라.”

그 풍미와 물성을 잘 쓰는 방법은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의 기본기술로서 오늘날에 이어진다. 저 기본적인 설명은 2026년 이후에도 유효할 테다. 한결같은 일상에는 구구한 설명이 생략되게 마련이다.




기록과 기록 밖

구황을 위한 메밀 또한 조선시대 내내 이어졌다. 관련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 속에 널려 있다. 숙종 때7)에는 논에 심은 메밀을 면세 처리한 적도 있다. 정조는 가뭄 끝에 비가 오자 “메밀이 대신 파종하기에 가장 알맞으니, 그 이유는 맨 나중에 심고 맨 먼저 익기 때문”이라고 유시했다.8) 이어 서리 맞기 전에 익는 곡식, 수제비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데다 줄풀9)의 열매만 한 맛과 영양분이 있는 곡식, 구황의 효과가 토란이나 고구마보다 월등한 곡식은 오로지 메밀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화성(華城) 지역에서 당장 메밀 파종을 선도하라고 끝맺었다.

이렇듯 메밀은 별미와 구황을 단숨에, 또 얼마든지 오갈 수 있는 작물이었다. 농민은 이런 사실쯤이야 국가와 지주가 참견하기 전에 훤히 알고 있었다. 수확 마친 논밭에서부터 산비탈에 이르는 곳곳을 알뜰살뜰 활용해 알아서 보험을 들었다. 그래서겠다. 먹을거리에 잇닿은 기록과 일상생활 감각과 행정 문서와 고고학 발굴이 메밀 이야기의 보물창고다. 예컨대 고려 시대 메밀 해운의 자취까지 역력하다. 1208년 나주·해남·장흥의 곡물을 개경으로 운반하다 난파되어 해저에 잠들었다가, 2007년 발굴된 마도 1호선에서는 벼·쌀·콩·조·젓갈류·메주가 적힌 화물표와 함께 메밀을 ‘木麥(목맥)’으로 쓴 화물표가 나왔다.10) 메밀은 이처럼 오랜 세월 표낼 것 없이 사람을 먹여 살린 자원이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1433)의 ‘교맥’.
교맥의 조선어 어휘를 ‘목맥’으로 부기했다.
ⓒ국립중앙도서관





01 이전에는 ‘모밀’이 ‘메밀’ 못잖게 쓰였다. 오늘날 메밀의 한자어는 ‘교맥(蕎麥)’이다.
02 조는 파종 시기에 따라 봄조와 그루조로 나뉜다. 봄조는 5월 파종, 그루조는 6월 중순~7월 상순 파종이다. 그루조는 밀 또는 보리를 수확한 뒤에 파종한다.
03 고영, ‘조선의 조리서 음식디미방’, 『그린매거진』, 2025년 12월호(통권 244호) 참조
04 기름을 되는 그릇. 한쪽에 귀를 낸 접시
05 ‘깁’은 거칠게 짠 비단. ‘뇌다’는 굵은체에 친 가루를 다시 고운체에 쳐 고운 가루를 받는 행위
06 이용기,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1936, 영창서관
07 ‘숙종실록’, 숙종 3년(1677) 9월 27일자
08 ‘정조실록’, 정조 22년(1798) 6월 5일자
09 포아풀과의 다년생 수초. 잎으로는 자리를 만들고, 열매와 어린 싹은 먹을 수 있다.
10 국가유산청 국립해양유산연구소(www.seamuse.go.kr)



Vol.247
2026년 0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