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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만지고 풀을 뽑으며, 자연의 시간표에 나를 맡긴다.
이 단순한 작업에 복잡했던 머릿속은 맑아지고 마음은 편안해진다.
충남 태안 안면도에 자리한 ‘놀샘터’는 번아웃(burn-out,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탈진 상태) 끝에서 한명숙 대표가 일궈낸 마음의 안식처다.
자연과 함께 ‘스스로 즐거워지는 법’을 깨닫는 이 공간을 모두의 삶을 보듬는 ‘치유의 공공재’로 만들고 싶다는 한명숙 대표를 만나봤다.
옛날 마을 어귀의 샘터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목을 축이고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며 쉬어가던 소통의 공간이었다. 한명숙 대표는 그 정겨운 풍경을 오늘날로 가져와, 지친 현대인들이 마음을 적시고 쉬어갈 수 있는 ‘마음의 샘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농장 이름을 ‘놀샘터’라 지었다.
“흙을 만지고 자연과 어울리는 모든 행위는 결국 스스로를 치유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누구나 스스로 즐거워질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놀샘터는 ‘치유의 공공재’가 되고자 합니다.”
놀샘터는 한명숙 대표의 남편이 경작하는 약 33,058m2(1만 평)의 논과 3,306m2(1천 평) 규모의 약초밭, 그리고 3,306m2(1천 평)의 온실과 텃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공간을 기반으로 농장의 자원을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직접 수확한 쌀로 떡 케이크와 꽃 송편, 에너지바를 만들고, 전통 고추장을 담그는 등 먹거리와 전통문화를 결합한 체험을 제공한다. 더불어 농장에서 기른 꽃을 활용해 압화 컵받침이나 소품을 만드는 활동도 함께 진행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손으로 담아내는 경험을 더한다.
특히 발달장애인을 위한 직업재활 프로그램에 힘을 쏟고 있다. 쌀 소분 작업부터 식용꽃 샌드위치 만들기, 기능성 비누 제작까지 농산물을 활용한 활동은 참여자의 자립을 돕는 실질적인 훈련으로 이어진다. 텃밭 활동이 어려운 여름과 겨울에도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사계절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늘봄학교 출강을 통해 아이들에게도 자연이 주는 치유의 경험을 전하고 있다.
한명숙 대표는 서울에서 원예치료사로 활동하며 치매 어르신과 장애인, 일반인을 대상으로 식물을 매개로 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대상자들이 밝은 표정을 되찾고 변화를 보일 때마다 깊은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타인을 돌보는 일에 몰두하는 사이, 정작 자신의 마음은 점점 지쳐갔다.
“치유를 돕는 일을 하면서도 왜 나는 점점 소진될까, 그 이유를 오래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깨달았습니다. 치료를 행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대자연 그 자체이며, 저는 그저 자연과 사람을 이어주는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 조력자)’라는 사실을요.”
이러한 깨달음은 삶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자연에 더 가까이 머무는 삶을 선택했고, 그렇게 향한 곳이 남편의 고향, 충남 태안 안면도였다. 귀농 초기의 시간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낯선 환경과 현실적인 부담 속에서 막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귀농 2년 차, 가족은 방향을 다시 잡았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한명숙 대표는 원예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구상했고, 남편은 농사와 건강원 운영을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의 역할을 나누며 하루하루를 쌓아갔고, 그 시간들이 지금의 놀샘터를 만들어냈다.
귀농 후 16년이 흐른 지금, 삶의 결은 분명히 달라졌다. 온실에 들어서면 시간의 흐름이 한층 느려진다. 삽목을 하고, 옮겨 심고, 흙을 나르는 사이 어느새 몇 시간이 지나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은 피로로 남지 않는다. 오히려 몸과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농장 온실은 이제 한명숙 대표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신만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 안에서 그는 일과 쉼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자신의 속도로 하루를 살아간다.
한명숙 대표는 자연 속에서의 몰입을 ‘멍 때리기’라고 표현한다. 손으로 흙을 만지고 허브 향을 맡는 동안 복잡했던 머릿속은 서서히 비워진다. 생각을 애써 정리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감각에 집중하는 사이 마음이 먼저 가라앉고, 그 비워진 틈으로 통찰이 조용히 떠오른다. 자연 속에 온전히 머무는 이 시간이 곧 쉼이자 치유로 이어지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주목하는 지점은 현대인이 흔히 겪는 ‘쉼에 대한 불안감과 죄책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고, 가만히 있는 시간조차 불안하게 느끼는 이들에게 농업은 특별한 대안이 된다. 풀을 뽑고 흙을 고르는 단순한 행위 속에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 선명히 남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감은 휴식에 따르는 심리적 부담을 자연스럽게 덜어준다.
“풀을 뽑는 일도 결국 식물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가치 있는 활동이에요. 그렇게 몸을 움직이다 보면 머릿속이 명료해지고 스스로를 지탱할 힘이 생깁니다. 일인지 쉼인지, 혹은 멍 때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그 삼박자의 상태, 저는 그것이 진정한 치유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일반 참여자들에게는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 독특한 제안을 건네기도 한다. “지금 가장 고민되는 것 하나를 마음속으로 세 번 생각하세요. 그리고 깨끗이 잊으세요.”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해답을 찾았느냐고 물으면 실제로 통찰을 얻었다는 이들이 많다. 마음을 어지럽히던 문제와 잠시 거리를 둔 채 다른 생명에 몰입하는 동안 시선이 바뀌고 생각이 정리된 덕분이다. 그 순간, 고민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무게로 남지 않는다.
놀샘터의 프로그램은 대상에 따라 접근법이 다르다. 같은 활동이라도 발달장애인에게는 루틴과 반복을 통해 자신감을 쌓는 과정에 방점을 두고, 치매 어르신에게는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회상과 정서적 지지, 잃어버린 유능감을 깨우는 데 집중한다.
현장에서 포착하는 치유의 신호는 소박하면서도 명확하다.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복숭아빛으로 상기된 얼굴, 눈과 입이 함께 웃는 표정, 그리고 호기심 가득한 태도가 그것이다. 마음의 문을 연 이들은 어김없이 개인적으로 농장을 다시 찾는다. 식물 키우는 법을 물으러 오기도 하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저 얼굴이 보고 싶어 발걸음을 하기도 한다.
한명숙 대표에게 치매 어르신들과 함께한 ‘산수정원 꾸미기’ 프로그램의 한 장면은 깊은 잔상으로 남아있다. 수십 년 전 고향 마을 어귀의 언덕을 회상하며 어스름 저녁까지 놀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쏟아내던 어르신들은, 활동이 끝난 뒤에도 “이제야 그 시절의 풍경이 생각이 난다.”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제 수업에 할머니, 할아버지는 없습니다. 대신 ‘농부님’, ‘여사님’이라 부르죠.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느낌이 좋다고 말씀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며 제가 더 큰 행복을 얻습니다.”
또한 한 대표는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계절에 따라 정해진 일을 반복하는 농업의 속성이 발달장애인에게 최적의 실습장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직업인으로서 역량을 키우는 훈련장이 되어보자는 생각은 작은 실천에서 시작됐어요. 수확한 채소로 요리를 해 이웃과 나누고, 허브 비누를 만들어 프리마켓에 내다 팔며 참여자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았죠. ‘연습하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지속 가능한 훈련 모델을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쌀 소분 작업부터 식용꽃 샌드위치 만들기까지, 연습을 거듭하며 성취를 맛본 이들은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삽목을 하고 식물을 옮겨 심으며 생기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는 ‘원예식물 기르기’ 훈련에 집중하고 있는 것. 실수해도 괜찮은 정서적 완충지대에서 즐겁게 일구어낸 결과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태안 로컬푸드 직매장 화훼 판매대에 올라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안면도라는 지역 자체가 치유농업에 큰 강점이 있다. 다리를 건너는 순간 일상과의 심리적 단절이 일어나고, 4면이 바다인 지형이 정서적 해방감을 더한다. 어느 방향으로든 5분이면 바다에 닿는 이 천혜의 환경은 치유 프로그램에 깊은 회복의 경험을 더하는 마중물이 된다.
귀농 16년 동안 놀샘터는 지역 아이들을 함께 키워내며 든든한 품이 되어주었다. 한때 농장을 누비던 아이들은 어느덧 장성해 가정을 이루고, 이제는 자신의 아이를 품에 안고 다시 이곳을 찾는다. 한명숙 대표가 그리는 미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바로 발달장애인과 홀로 사는 어르신을 잇는 공유농장 모델이다. 어르신은 평생 쌓아온 농사 지식과 따뜻한 정을 나누고, 장애인은 어르신의 텃밭에 일손을 보태며 지역사회의 어엿한 일꾼으로 거듭나는 상생의 구조다.
“언제든 찾아와 ‘밥 한 끼 달라’고 하면, 텃밭을 가꾸는 동안 뚝딱 된장찌개 한 상 내어줄 수 있는 농장이 되고 싶어요. 물론 텃밭에 손을 보태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요. 숨차지 않을 만큼만, 각자 할 수 있는 만큼만 지역과 나누는 작은 공유농장, 나아가 ‘안면도형 캠프힐’을 꿈꿉니다.”
그는 치유농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가치를 심는 농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당부하는 동시에, 치유농업이 공식적인 사회적 처방 시스템으로 안착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독자들에게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존재’하는 즐거움을 누려보시길 권합니다. 그저 식물의 느린 속도에 나를 맞춰보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당신을 위한 치유농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