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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생명이 때로는 시대의 운명을 바꾸고, 역사의 풍경을 바꾸고, 인간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박진우 농업연구관은 병해충이라는 작은 것들의 세계를 오래 연구해 왔다.
긴 시간 끝에 그가 다시 돌아보게 된 것은 생명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였다.
그에게 농업은 더 이상 과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역사와 문화를 함께 읽는 일이기도 했다.
1992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농촌진흥청에 입사한 박진우 농업연구관은 농약연구소에서 첫발을 디뎠다. 대학 시절 식물병리학을 전공한 그는 통일벼 개발과 녹색혁명에 깊은 관심을 품었고, 식량 자급 이후에도 농가를 다시 흔드는 병해충 문제를 접하며 자연스레 식물 병해충 연구의 길로 들어섰다. 식물 바이러스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에는 연구기획 부서로 자리를 옮겨 다양한 경험을 쌓았고, 특히 5년여의 홍보 업무는 그의 시야를 넓히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연구자나 공무원 사이에서 통용되는 언어만으로는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 체감했다. 그는 이후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더 넓은 시야로 농업 현장을 바라보고자 했다.
스스로를 두고 그는 화려한 성과를 앞세운 연구자라기보다, 후배들에게 연구 철학과 방향성의 씨앗을 건네는 사람에 가깝다고 말한다. 연구는 단지 실험과 분석 결과의 축적이 아니라, 왜 이 연구를 하는지 끝까지 되묻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이 없다면 연구자는 나침반 없이 망망대해를 떠도는 것과 같다.”는 그의 말에는 오랜 시간 연구실 안팎을 오가며 다져 온 신념이 오롯이 담겨 있다.
박진우 농업연구관은 식물 병해충을 단지 농업 생산을 위협하는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에게 병해충은 때로 산업의 흐름을 바꾸고, 한 사회의 문화와 생활방식까지 뒤흔드는 존재다. 아일랜드를 대기근으로 몰아넣은 감자역병, 영국의 차 문화를 커피에서 홍차로 기울게 한 커피녹병, 미국 철도 산업의 기반이던 목재산업에 타격을 준 밤나무동고병, 그리고 오늘날의 비트코인처럼 투기 광풍을 몰고 와 네덜란드 경제 체제에 타격을 준 튤립 바이러스까지. 수많은 시대의 변곡점마다 병해충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는 이 작은 생명들이 인간 사회 전체를 흔들어 놓은 장면들을 오래 기억하고 있다.
그가 손에 든 소설책 한 권에도 병해충과 시대가 맞닿는 지점이 보인다. 데니스 존슨의 소설 『기차의 꿈』에는 밤나무동고병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작품 속 20세기 초 미국 철도 산업의 팽창과 황폐해져 가는 산림의 분위기, 점차 나무들이 살기 어려워지는 배경을 따라가며 밤나무동고병의 그림자를 떠올렸다고 했다. 침목을 떠받치던 나무가 병으로 무너지고, 그 빈자리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산업의 방식과 노동의 풍경 또한 달라졌으리라는 해석은, 그가 병해충을 단지 농업 현장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과 삶의 구조를 건드리는 문제로 바라보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직접적인 언급이 없더라도 시대의 공기와 숲의 분위기 속에서 병해의 흔적을 읽어내는 일, 그것이 바로 그가 과학을 역사의 서사 속에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가 후배 연구자들에게 가장 자주 강조한 화두는 ‘병해충과의 공존’이다. 식물 병해충은 오랜 세월 인류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었고, 지금도 식량 생산 체계를 위협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미래의 연구 방향이 무조건적인 박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대면적 단일 품종 재배와 생태계 다양성의 파괴, 무한 효율을 좇는 자본주의적 농업 구조가 병해충 대발생의 토양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병해충도 결국 생태계의 일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연구의 목표는 몰아내는 데만 있지 않고 자연의 순리와 균형을 회복하는 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작은 생명체이기에 쉽게 없앨 수 있으리라는 인간의 오만은 끝내 승리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그는 후배 연구자들에게도 연구의 열정만큼이나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기 분야를 더 넓은 삶의 맥락 속에서 읽어낼 때, 비로소 연구의 방향도 사람을 향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의 말 곳곳에 배어 있다.
홍보 업무를 거치며 그에게 더욱 또렷해진 생각은 ‘농업은 문화’라는 것이었다. 영어 단어 ‘농업(agriculture)’ 안에 ‘문화(culture)’가 깃들어 있듯, 농업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삶과 공동체, 노동과 음식, 풍습의 뿌리가 되어 왔다. 사람들은 함께 땅을 일구고 수확을 나누며 문화를 만들었고, 그 시간의 축적 위에서 사회도 성장해 왔다. 그래서 그는 농업을 단순한 생산 기술로만 이해하는 시선을 아쉬워한다. 연구 성과 또한 과학의 언어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되며, 일반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를 입을 때 더 큰 힘을 얻는다고 믿는다.
그는 농촌진흥청의 대표 성과인 통일벼와 녹색혁명 역시 언젠가는 천만 영화의 소재가 되기를 바란다. K-팝이 전 세계에 한국이라는 이름을 알렸듯, 농업 연구 성과 또한 문화의 옷을 입을 때 더 넓은 세계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기술자나 실무자에 머무르지 말고, 자기 성과를 자신만의 언어로 빛낼 수 있는 크리에이터가 되라고 당부한다. 연구는 논문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세상과 만나는 방식까지 포함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가 추천한 책은 황석영의 『할매』다. 군산 하제마을의 600살 팽나무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 소설은 생명의 갯벌과 마을 공동체의 시간을 장대한 서사로 품고 있다.
박진우 농업연구관은 이 작품이 생명의 가치와 소중함을 깊은 울림으로 일깨워 준다고 말한다. 그가 메뚜기와 벼멸구 같은 작은 생명체를 떠올리며 경외감을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류의 식량에 피해를 주는 존재일지라도 그것 역시 생태계의 일원으로 마주해야 하며, 인간과 병해충 사이에도 오래된 대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할매』는 그에게 생명을 정복과 박멸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 태도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 준 책이다.
퇴직을 앞둔 지금도 그의 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조직 생활에 묶여 미뤄 두었던 여러 배움을 시작했고, 그중 끝까지 자신에게 남는 것을 골라 인생 2막을 가꾸고 싶다고 했다. 무엇보다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작업, 문화예술 작품 속 농업과 식물 병해충의 흔적을 찾아 창작 활동으로 이어가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설 생각이다. 과학의 언어로 시작한 삶이 이제는 글과 이야기, 문화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결국 그가 34년 동안 지켜 온 것은 작물만이 아니었다. 농업의 시간과 사람의 삶, 그리고 그것을 세상과 연결하는 태도와 언어까지, 그는 오래도록 그 경계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