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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산 씨감자에 의존하던 파키스탄 농업이 한국형 무병 종자 생산 체계를 도입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농촌진흥청이 2020년 이슬라마바드에 문을 연 ‘KOPIA* 파키스탄 센터’가 그 중심에서 기술 혁신을 이끌고 있다.
수경재배 기술이 현지에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씨감자 자급화의 길이 열렸으며, 이러한 성과는 이제 축산 기술 협력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파키스탄은 인구 약 2억 4,000만 명 중 4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 중심 국가다. 감자는 밀, 쌀, 사탕수수와 나란히 4대 식량 작물로 꼽힌다. 연간 생산량은 2000년 187만 톤에서 2018년 487만 톤으로 20년 새 2.6배 급증했다. 현재 파키스탄은 세계 9위의 감자 생산국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 ‘감자 강국’의 이면에는 구조적인 모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정작 감자 재배의 출발점인 씨감자의 자급률은 고작 3%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농가는 병해충에 취약한 자가채종 종자를 해마다 반복 사용하며 생산성 저하를 감수하거나, 비싼 외국산 씨감자를 들여와야 했다. 2021년 한 해에만 씨감자 수입에 약 150억 원(1,120만 달러)의 외화를 지출할 만큼 의존도가 심각했다. 좋은 씨감자를 확보하지 못한 농가는 풍작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수입 비용 부담은 농가 경제를 위축시켰다. 씨감자 자급화는 파키스탄 정부의 오랜 숙원이자 절박한 국책 과제였다.
문제는 단순히 종자 수급에 그치지 않았다.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 기온과 잦은 병해충 발생, 노후화된 재배 기술이 맞물리면서 파키스탄 농업 전반의 생산성은 정체 상태에 머물렀다. 국가 식량안보와 농가 소득 모두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2020년 8월, 농촌진흥청은 파키스탄 농업연구청(PARC)과 공식 협력에 나섰다. 같은 해 9월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KOPIA 파키스탄 센터’가 문을 열었다. 파키스탄 센터는 씨감자 문제의 해법으로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무병 씨감자 분무수경재배 기술’을 제시했다. 흙 없이 물과 양분만으로 씨감자를 키워내는 이 방식은 토양을 매개로 한 병해충 감염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기존 토경재배가 안고 있던 가장 큰 취약점인 바이러스와 병해충으로 인한 품질 저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접근이었다.
현지 도입 성과는 수치로 입증되었다. 기존 토경재배 방식과 비교해 생산성이 6배 이상 향상되었다. 무병 씨감자의 핵심 품질 지표인 바이러스 감염률은 2.9%를 기록했다. 이는 파키스탄 국가 인증 기준인 3% 이하를 충족하는 결과다. 단순히 생산량을 늘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안전하고 균일한 품질의 씨감자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4년 기준 씨감자 약 520만 개(164톤)를 생산했으며, 참여 농가는 47호까지 늘어났다. 생산된 씨감자는 바이러스 검사를 통해 병 발생 여부를 철저히 관리하며, 현재까지 261명이 관련 교육을 이수했다. 기술을 전수받은 농민들은 이제 품질 좋은 씨감자를 직접 생산하는 주체로 변화하고 있다.
기술 도입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이를 뒷받침할 인프라 구축도 본격화되었다. 2025년 3월, 이슬라마바드에 3.2ha 규모로 조성한 ‘무병 씨감자 종합생산단지’가 그 결실이다. 이 단지에는 조직배양묘를 재배하는 첨단 수경재배 온실(약 3,400m2)부터 원원종을 증식하는 망실하우스(약 29,000m2), 그리고 수확한 씨감자의 품질을 보존하는 저온 저장시설까지 핵심 시설이 모두 들어섰다.
이 단지는 단순한 재배 공간을 넘어 씨감자의 생산과 증식, 저장 및 보급까지 전 과정을 하나의 흐름으로 잇는 통합 시스템의 역할을 수행한다. 기존에는 각 단계가 개별적으로 이루어져 품질 편차가 크고 공급이 불안정했으나, 이를 하나의 체계로 묶으면서 품질 관리와 공급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씨감자가 농가에 도달하기까지의 전 과정이 비로소 체계적인 관리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무병 씨감자 종합생산단지’를 거점으로 2025년에는 씨감자를 1,000톤 이상 생산했고, 2028년까지 연간 공급량을 16만 톤 수준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는 파키스탄 전체 수요량의 30%에 달하는 규모로, 농가 소득을 ha당 1,200달러(2023년)에서 1,700달러(2028년)까지 약 42% 높이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도 세웠다.
단지 건설 과정에서 한국 기업이 약 10억 원 규모의 사업을 수주했다는 점도 의미가 깊다. K-농업 기술이 현지에 이식되는 동시에 국내 농업 기술과 자재가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선순환 구조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씨감자 공급은 생산량 확대와 품질 향상으로 이어져 시장 경쟁력을 강화하고 농가 수익 구조를 개선하는 등, 씨감자 하나가 파키스탄 농업 전체의 체질을 바꾸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KOPIA 파키스탄 센터의 성과는 파키스탄 정부의 정책 변화를 직접적으로 이끌어냈다. 파키스탄 정부는 사업 효과를 높이 평가해 2023년 ‘무병 씨감자 자급 시스템 구축’을 국책사업으로 공식 지정했다. 이어 한국과 파키스탄이 각각 250만 달러를 투자하는 매칭펀드를 조성하며 사업 규모를 대폭 확장했다. 이는 단순히 원조를 받는 단계를 넘어, 현지 정부가 직접 예산을 투입해 운영하는 능동적인 공동사업으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한다.
씨감자 시범마을에서 시작된 변화는 이제 4개 주정부가 참여하는 전국 단위 사업으로 확대되었다. 개발협력 사업이 수원국의 정책으로 내재화되어 지속성과 확장성을 동시에 확보한 이 사례는 국제 농업협력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공 모델로 꼽힌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4년 11월에는 굴람 무함마드 알리 파키스탄 농업연구청장이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KOPIA 파키스탄 센터의 협력 범위는 씨감자를 넘어 축산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파키스탄 농업 전반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축산 현대화 지원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파키스탄은 연간 586억L의 우유를 생산하는 세계 3위의 우유 생산국이다. 하지만 젖소 한 마리당 평균 생산량은 한국의 7분의 1 수준인 연간 1,461L에 불과하다. 이는 난교잡 품종 위주의 사육 환경과 인공수정 기술 부족으로 인해 유전적 개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산 규모에 비해 효율이 턱없이 낮은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KOPIA 파키스탄 센터는 이를 해결하고자 한국산 홀스타인 젖소 정액을 도입하고 발정동기화, 인공수정, DNA 분석을 포함한 ‘번식기술 패키지’를 전파하고 있다. 2024년 한 해에만 442건의 인공수정을 수행하고 50명의 전문 인력을 양성했으며, 체외수정 실험에서도 최대 81%의 안정적인 수정률을 기록하며 현지 적응 가능성을 입증했다. 향후 3년간 1,500개의 정액을 활용해 연간 600마리 이상의 인공수정을 실시하고, 우수한 송아지의 혈통과 산유량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계획이다.
조사료 분야의 자립화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파키스탄 농업에서 축산업은 부가 생산품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핵심 산업이지만, 사료 종자의 76%를 수입에 의존하는 취약한 구조다. 특히 겨울철에는 조사료가 부족해 가축의 영양 상태와 생산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고질적인 문제를 겪어왔다.
이에 KOPIA 파키스탄 센터는 24개 농가를 대상으로 고품질 사료용 귀리 품종(NARC OAT)과 농자재, 재배 기술을 함께 지원하고 있다. 2024년에는 144ha 면적에 귀리를 보급해 14.4톤의 종자 수확을 목표로 삼았으며, 현장 교육을 통해 농가 역량을 강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를 통해 겨울철 파키스탄 가축의 영양 상태 개선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씨감자, 젖소 개량, 조사료로 이어지는 KOPIA 파키스탄 센터의 성과는 단순한 기술 전수를 넘어선다. 이는 파키스탄 농업이 오랫동안 마주해 온 구조적 난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체질 개선의 과정이다. 센터는 단순한 기술 보급에 머물지 않고, 파키스탄 정부와의 업무협약(MOU)을 바탕으로 종자 관리·감독 체계 정비, 지방정부 연계 사업 확대, 농산업 민간기업의 참여 유도까지 통합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연구와 보급, 교육과 제도를 하나의 사슬로 묶어내는 방식이다.
씨앗 하나가 땅에 뿌려져 온전히 결실을 보기까지는 수많은 조건이 어우러져야 한다. 우수한 종자와 이를 뒷받침할 안정적인 인프라, 전문가,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탱하는 제도가 필수적이다. KOPIA 파키스탄 센터는 현재 그 모든 조건을 현지 맞춤형으로 구축해 나가고 있다. 파키스탄 농업의 미래를 근본적으로 바꿀 변화의 씨앗은 이미 현장에 깊이 심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