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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실 위기에 놓였던 우리 재래돼지가 첨단 유전체 기술을 통해 현대적인 미식 자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재래돼지의 풍미를 살린 ‘우리흑돈’과 전 부위를 구이용으로 확장한 ‘난축맛돈’은 수입 종돈 중심의 시장 구조에 변화를 만들고 있다.
이번 설, 국가대표 흑돼지가 제안하는 새로운 미식의 세계를 경험해보자.
우리흑돈
우리나라 재래돼지는 고구려 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사육된 기록이 있을 만큼 우리 민족의 삶과 궤를 같이해 온 소중한 식량자원이다. 몸집은 작지만 단단한 체구에, 쫄깃한 육질과 특유의 고소한 향미를 지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절 수탈과 산업화 과정의 경제 논리에 밀려 재래돼지는 점차 자취를 감췄다. 외래종에 비해 성장이 느리고 새끼를 적게 낳는다는 이유로 농가로부터 외면받으며 멸실 위기에 처한 것이다.
우리 땅에서 사라져가던 재래돼지의 맛을 되살린 것은 끈질긴 과학적 집념이었다. 국립축산과학원은 1980년대부터 일제강점기 이후 흩어진 재래돼지의 혈통을 찾아 복원하는 장기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전국 각지에서 ‘토종돼지’나 ‘꺼먹돼지’로 불리던 개체들을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한 끝에, 2008년 토종 재래돼지 ‘축진참돈’ 복원에 성공했다. 우리 땅에 오랜 기간 적응해 온 덕분에 질병에 강하고 지방이 단단해 씹는 맛이 일품인 재래종의 형질이 고스란히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이후 국립축산과학원은 토종 재래돼지가 우리 식탁에 다시 오를 수 있도록 현대적 개량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2013년에는 제주재래흑돼지를 활용해 등심과 뒷다리살 등 저지방 부위까지 구이로 즐길 수 있는 ‘난축맛돈’을 선보였다. 2015년에는 재래돼지의 우수한 육질은 유지하면서 생산성은 개선해 경제성을 높인 ‘우리흑돈’을 탄생시켰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종자를 재현하는 수준을 넘어 우리만의 독자적인 유전자원을 확보해 국가 종자 주권을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멸실 위기를 딛고 탄생한 두 품종은 사라진 옛 맛을 복원하는 동시에 한국형 흑돼지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한 소중한 과학의 결실이다.
복원된 재래돼지는 뛰어난 맛을 자랑했지만, 사육 기간이 길고 번식성이 낮아 농가 입장에서는 경제성 확보가 쉽지 않았다. 이에 국립축산과학원은 재래종의 우수한 유전적 장점은 살리되 경제적 약점을 보완한 한국형 흑돼지 우리흑돈을 개발했다. 우리흑돈은 육질이 뛰어난 복원 재래돼지 ‘축진참돈’과 생산성이 검증된 ‘축진듀록’을 교잡해 완성한 품종이다.
특히 재래돼지의 혈통 비율을 37.5%로 정교하게 고정하고, 털색 유전자(MC1R)를 100% 검은색으로 순수화했다. 덕분에 농가에서 자가교배를 하더라도 다른 색의 털이 섞이지 않아 안정적인 대량 보급의 길이 열렸다. 그 결과 우리흑돈은 2015년 국제식량농업기구(FAO) 가축다양성정보시스템(DAD-IS)에 이름을 올리며, 대한민국 독자적인 흑돼지 품종으로 국제적 인정을 받았다.
우리흑돈은 고기 속에 녹아 든 지방인 근내지방 함량이 4.3%로 일반 상업용 돼지(1~2%)보다 훨씬 높아, 탄력 있는 식감과 풍부한 육즙을 자랑한다. 생산성 측면에서도 혁신을 이뤄냈다. 기존 재래돼지는 출하까지 약 230일이 걸렸으나 우리흑돈은 이를 180~190일로 대폭 단축했으며, 한 번에 낳는 새끼 수도 2~3마리 더 많아 농가의 고질적인 고민을 해결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우리흑돈은 수입 종돈에 의존하던 시장에 국산 품종이라는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하고 있다.
난축맛돈
국립축산과학원은 우리흑돈의 연구 성과가 실제 식탁으로 이어지도록 소비자 접점을 넓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우리흑돈의 민간 종돈장인 덕유농장은 전문 브랜드 ‘피밀리우리흑돈’을 통해 2018년부터 우리흑돈을 판매해 왔고, 2022년 오프라인 매장을 열었다. 현재 월 300두 규모의 안정적인 물량을 기반으로 온라인 쇼핑몰과 오프라인 매장에서 소비자와 직접 만나고 있다.
대형 유통망 진입 역시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해 이마트 판매행사인 ‘고래잇페스타’와 연계해 우리흑돈 전용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론칭했으며, 현재 이마트 전 매장에서 전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판매 중이다.
우리흑돈의 다음 단계는 일반 돼지 시장으로의 확장이다. 통상 국내 돼지 생산은 세 가지 품종을 교배하는 ‘3원 교잡’ 방식을 따르는데, 이때 아비 돼지로 쓰이는 수컷 ‘듀록’ 대신 우리흑돈을 활용하는 것이 핵심 전략이다. 이 방식을 도입하면 사육 기간은 약 5일 늘 수 있으나, 근내지방 함량이 25.9% 향상되는 것을 비롯해 향미와 육색 등 모든 품질 지표를 프리미엄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실제로 2024년에는 민간 축산기업 팜스코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우리흑돈의 일반 시장 확장과 브랜드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난축맛돈은 전 부위 구이용이라는 목표를 가장 선명하게 구현해낸 품종이다. 육질이 뛰어난 ‘제주재래흑돼지’와 번식능력과 성장이 우수한 ‘랜드레이스’를 교잡해 2013년 세상에 나왔다. 난축맛돈의 가장 큰 차별점은 국립축산과학원이 세계 최초로 구명한 제주재래흑돼지의 맛 관련 유전자(MYH3 변이)를 적용했다는 점이다. 이 유전적 형질을 고정한 결과, 근내지방 함량은 일반 돼지를 크게 웃도는 10% 내외까지 높아졌고 육질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보수력이 뛰어나 가열 과정에서도 육즙 손실이 적다는 점은 난축맛돈의 대표적인 강점이다.
난축맛돈의 핵심 가치는 삼겹살과 목심에만 편중된 돼지고기 소비의 틀을 완전히 깨뜨렸다는 데 있다. 기존에는 퍽퍽한 식감 탓에 주로 찌개나 산적용으로 쓰이던 등심, 뒷다리살 등의 저지방 부위까지 구이용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부드럽게 재탄생했다. 특히 등심 부위를 뼈째 잘라낸 ‘돈마호크’는 캠핑족과 미식가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소외받던 부위의 화려한 변신을 주도했다. 부위별 맛의 격차를 과학으로 해결하자 돼지 한 마리의 가치가 통째로 높아진 것이다.
이러한 미식적 성취는 농가의 실질적인 소득 증대로 직결되었다. 난축맛돈은 불안정한 시장 경매가에 휘둘리지 않고 ‘난축맛돈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고정단가 계약 거래를 통해 농가에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고 있다. 한국농업기술진흥원의 기술가치평가에 따르면, 난축맛돈 개발기술의 경제적 가치는 약 7,851억 원으로 평가되며, 향후 10년간 종돈 수입 대체에 따른 경제적 효과가 기대된다. 토종 유전자를 보존하고 산업화로 연결한 이 성과는 우리 축산업의 중장기 경쟁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술 자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난축맛돈의 미래 전략은 세 갈래로 펼쳐진다. 방향은 분명하다. 농가에서 키우기 쉽고, 시장에서는 분명히 다른 맛으로 인정받고, 해외에서도 통하는 흑돼지다.
첫 번째는 유전체 기반 품종 고도화다. 난축맛돈은 번식 능력이 뛰어난 모계 계통과 고기 생산성이 우수한 부계 계통, 두 개의 축군을 중심으로 정교한 품종 체계를 구축할 계획이다. 여기에 근내지방 함량과 지방산 조성, 육색을 좌우하는 주요 유전자 변이를 적극 활용해 개체별 형질 예측 정확도를 높인다. 유전자 정보를 바탕으로 한 정밀 선발과 표준화된 사양관리 매뉴얼을 통해, 농가와 환경이 달라도 일정한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다. ‘맛의 균일성’을 과학으로 설계하겠다는 접근이다.
두 번째는 시장 확장을 전제로 한 산업화 전략이다. 현재 제주 12곳, 내륙 2곳에서 운영 중인 전용 사육농가를 점차 확대하고, 생산·가공·유통을 하나로 묶는 통합 품질관리 체계(QMS)를 강화한다. 난축맛돈은 이미 등심을 구이용으로 재해석한 ‘돈마호크’로 가능성을 입증했다. 여기에 ‘쫄데기살’ 등 전용 구이 부위를 늘리고, 숙성육과 가공육으로 활용 범위를 넓혀 외식과 미식 시장까지 아우르겠다는 구상이다.
세 번째는 글로벌 브랜드화다. 국제식량농업기구(FAO) 가축다양성정보시스템(DAD-IS)에 등재된 국제 공인 품종이라는 점은 난축맛돈의 강력한 출발선이다. 일본의 ‘가고시마 흑돼지’, 스페인의 ‘이베리코’처럼 지역성과 유전자 고유성을 결합한 브랜드 모델을 벤치마킹해 해외 시장 진출을 준비한다. 이를 위해 위생·검역 체계를 수출 기준에 맞게 정비하고, 국제 식품 박람회와 전시회를 통해 난축맛돈의 정체성을 알릴 계획이다.
이번 설 명절, 소중한 이에게 마음을 전할 특별한 선택지로 ‘국가대표 흑돼지’가 떠오르고 있다. 평범하고 익숙한 선물들 사이에서 우리 품종인 ‘우리흑돈’과 ‘난축맛돈’은 미식의 즐거움을 더한 고품격 선물로 각광받는 중이다. 삼겹살과 목심에 집중돼 있던 기존의 소비 방식을 벗어나, 돼지 한 마리의 다양한 부위를 구이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미식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우리 돼지의 우수한 맛과 희소성은 실질적인 만족감을 주는 특별한 선물이 된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우리 종자 주권을 지키고 국내 농가와 상생하려는 과학계의 오랜 노력이 녹아 있다. 국립축산과학원은 우리흑돈의 대중화와 난축맛돈의 글로벌 브랜드화를 추진하며, 수입산 프리미엄 돼지고기 이베리코 대안을 넘어선 ‘한국형 흑돼지’의 새로운 기준을 세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