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잘 구워진 고기 한 점을 입에 넣는 순간, 혀끝에 부드러움이 녹아 내리고 이내 탄력 있게 터지는 육즙이 입안 가득 번진다.
씹을수록 진하게 차오르는 고소함까지, 경북 경산에서 만난 토종돼지 ‘우리흑돈’은 단 한 점만으로도 ‘확실히 다르다’는 인상을 준다.
이 찰나의 황홀경이 식탁 위에 오르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가 본다.
우리나라 고유 품종인 ‘재래돼지’는 오랫동안 시장에서 비효율적인 품종으로 분류되어 밀려나 있었다. 고기 색이 붉고 근육 내 지방이 많아 풍미는 독보적이지만, 성장 속도가 너무 더디고 새끼도 적게 낳아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국립축산과학원은 2015년 재래돼지와 생산성이 우수한 ‘축진듀록’을 교잡해 새로운 품종인 ‘우리흑돈’을 개발했다. 재래돼지의 장점인 근내지방은 4.3%까지 끌어올리고, 사육일수는 40일 이상 단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때 시범사업으로 참여한 농가가 바로 덕유농장이다. 1987년부터 축산업에 종사하며 이미 일반돼지 3,000마리를 키우고 있던 박복용 대표가 안정적인 길을 두고 모험에 뛰어든 이유는 산업의 미래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박 대표는 “잘 키워도 가격은 늘 비슷했고, 더 잘 키운다고 해서 농가의 개성이나 품질 차이가 시장에서 반영되지 않는 구조였다.”고 회상했다. 치솟는 사료값과 인건비 사이에서 그가 발견한 돌파구는 ‘양보다 질’을 중시하는 소비 트렌드였다. 2016년, 그는 우리흑돈이 지닌 가치가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기술 이전을 받아 우리흑돈을 사육하는 과정은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나 진짜 장벽은 유통이었다. 일반돼지를 중심으로 표준화된 유통 구조 안에서는 우리흑돈이 지닌 가치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부산, 김해, 경북 일대를 돌며 판로 개척에 나섰지만 돌아오는 것은 적자와 시장 진입의 높은 문턱이었다. 이때 구원투수로 나선 이가 박 대표의 장남 박장범 씨다. 우리흑돈의 가치를 기존 유통업체를 대상으로 설득하는 대신, 소비자에게 직접 다가가는 방식을 택했다.
박장범 씨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직접 글을 올리며 소비자 한 명 한 명과 대화를 이어갔다. 맛에 대한 질문부터 조리법 문의까지 모든 질문에 직접 응대했다. 클레임도 피하지 않고 귀한 의견으로 여기며 반영했다. 번거롭고 시간과 노력이 드는 방식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자산이 쌓였다. 한 번 맛을 본 소비자들은 재구매로 응답했고 자발적으로 입소문을 내주기도 했다. 이 시기를 버텨낸 뒤에야 유통 구조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고정 고객층이 형성되면서 물량 예측이 가능해졌고, 그 흐름은 마켓컬리 등 프리미엄 식품을 찾던 대형 플랫폼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후에는 비선호 부위의 판로를 위해 급식 시장을 공략했다. 코로나19 시기, ‘믿을 수 있는 고기’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면서 타이밍도 맞았다.
오랫동안 발로 뛰며 쌓아온 신뢰에 불을 지핀 것은 지난해 2월 획득한 ‘토종돼지 인정’이었다. 우리흑돈이 돼지인정기관인 한국종축개량협회에서 ‘토종돼지’ 공식 인정을 받자, 시장의 흐름에 민감한 대기업과 유통 채널에서 즉각 반응하기 시작했다. 현재 덕유농장의 우리흑돈은 갤러리아와 롯데백화점 등 주요 백화점의 프리미엄 육류 코너에 입점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덕유농장의 정체성은 단순히 고기를 키워 파는 비육 농가에 머물지 않는다. 이곳은 다음 세대의 돼지를 만들어내는 출발점, ‘종돈(種豚) 농가’다. 종돈 농가는 돼지 개체 하나하나를 단순한 상품이 아닌 ‘유전자’로 관리한다. 어떤 돼지가 새끼를 얼마나 많이 낳는지, 성장 속도와 육질은 어떤지 꼼꼼히 관찰하고 기록한다. 이렇게 축적된 현장 데이터는 연구진과 공유하며 우리흑돈 개량의 핵심 지표로 활용하고 있다. 농장과 국립축산과학원이 상시 소통 구조로 연결되어 품종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방식이다.
선별된 우수한 유전자는 정성 어린 사육을 거쳐 비로소 고품질의 육질로 완성된다. 사육을 담당하는 차남 박성범 씨는 “프리미엄 고기는 언제 먹어도 같은 만족감을 줘야 한다”며 연중 품질 유지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는다. 여름철 더위로 지방이 빠지거나 겨울철 활동성 저하로 성장 패턴이 달라지는 변수를 줄이기 위해, 농장에서는 계절별로 사료를 보강하고 출하 리듬을 세밀하게 조절한다. 도축장 선정에서도 효율보다 품질을 우선한다. 물류비와 이동 시간의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시설 관리가 안정적이고 위생 수준이 높은 곳을 고집하고 있다. 정성껏 키운 돼지의 육질과 풍미가 마지막 단계에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한 원칙이다.
박복용 대표는 우리흑돈이 단순히 ‘맛있는 고기’라는 찬사에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국가가 개발한 토종 종자를 민간 농가가 10년 이상 유지하며 확장해온 이 사례가 산업적 가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유전자원 주권’ 측면에서도 독보적인 의미가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우리나라에도 세계적인 품종과 어깨를 나란히 할 프리미엄 돼지가 있다는 사실을 정부 차원에서 더 널리 알려야 한다.”며 우리흑돈이 국가의 품종 자산으로서 공식 무대에 더 자주 오르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그가 말하는 앞으로의 과제는 분명하다. 좋은 품종이 현장에 완전히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안정적인 소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흑돈의 품질과 가치를 이해하고 소비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농가도 사육과 개량을 이어갈 힘을 얻는다. 여기에 제도적 지원과 홍보가 더해진다면 시너지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산자수와 성장 속도를 상향 평준화하여 생산성을 안정 궤도에 올리려는 시도 역시 한결 탄력을 받을 수 있다. 수입 종돈에 의존하지 않는 ‘한국형 프리미엄 돼지’의 기준을 세우겠다는 박 대표의 포부는 바로 이 지점을 향하고 있다.
국가가 만든 종자를 책임지고 키워온 지난 10년은 쉽지 않은 도전의 연속이었지만, 그만큼 분명한 축적의 시간이기도 했다. 박복용 대표가 걸어온 길은 사라질 뻔한 토종 돼지를 다시 ‘산업의 언어’로 되살리는 커다란 가능성을 증명해 보였다. 농장의 땀방울과 국립축산과학원의 기술력, 그리고 가치 있는 먹거리를 찾는 소비자의 선택이 삼박자를 이룰 때 우리흑돈은 ‘K-푸드’의 새로운 자존심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